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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10 조회수1,44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

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자녀가

남편 가진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복음 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시각과 청각 중복 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헬렌 켈러

(Helen Keller, 1880~1868)는

 자신의 책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첫날은 나를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는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

빛나는 노을을 볼 것이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
평생 세상을 볼 수 없었던

그녀였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세상을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을 딱 3일 동안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위와 같은

3일 동안의 계획을

말했던 것이지요.

 아마 실제로 3일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큰

 기적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앞을

잘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게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상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는

 정말로 살고 싶은 기적 같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는 기적을

매일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텐데 실제 우리는

감사의 삶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드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더 좋은 것을 보고

더 좋은 말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할 텐데,

정작 나쁜 것을 보고

나쁜 말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이나 기적들을

청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해야 할 일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기적과 같은

 삶인데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더 많은 욕심과

이기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삶에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고래 뱃속에서 삼 일 동안

지냈던 사건이 아닙니다.

요나 예언자의 말 한 마디로

 니느웨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로

마음으로 돌렸던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표징은 마음의 변화,

진정한 회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 어떤 기적이나 표징이 와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많은 기적과

표징을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기적과 표징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기적과 표징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린다.

(정호승)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헬렌켈러.

거울과 창문

스승과 제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묻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젊은 부인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스승은 이제 제자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보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거울과 창문은 똑같은

유리로 만들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거울에는

은을 칠했고 창문에는

 아무것도 바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칠한

은을 벗겨버려야 한다.”
내 마음에 칠해 있는

 은은 어떤 것일까요?

욕심과 이기심의 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은,

 미움과 다툼의 은

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내 마음에 어떠한 것도

칠해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요빠에 있는 고래 동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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