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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또 다른 현대판 바리사이가 되려는 우리는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12 조회수1,316 추천수3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가끔씩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한다. 믿음의 길을 쉽게 가는 길이 없겠냐는 거다. 성당 안 가자니 그렇고, 가자니 재미없단다. 기쁨이어야 할 믿음이 가끔은 멍에가 된단다. 대부분이 끌려가는 신앙이기에 그렇다. 물질의 십일조 못지않게 사랑의 십일조도 중요하다. 그러니 하루 중 몇 시간은 떼어 놓자.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 시간으로 남기자. 꼭 가야 할 곳이라면 미사 후로 하자. 시간의 십일조도 중요하니까. 이런 앞서 가는 믿음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중성을 지니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란다.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이 각인된단다. 아기는 무의식 속에 자신이 내쳐지는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나. 이게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 한다. 주일 미사에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면 고해성사 감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신자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면 이 점만을 강조해, 고해소에서 이 내용만 덜렁 들춘다. 더구나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판공성사 때까지 내내 성사를 보지 않는다나. 마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달리 고백할 죄가 없고, 주일 미사 빠지는 것만이 내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인 듯이.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십일조도 소홀하면 안 되지만, 사랑은 더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너희도 윗자리와 인사받길 좋아한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다! 너희는 다른 이들에게 짐 지우고,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루카 11,42-46 참조)

 

예수님께서는 작정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이른바 독설을 뿜어내신다. “불행하여라!”라며, 그 이유로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는 정작 자신들은 거기에 손가락 하나 대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지적하신다. 오죽하면 속이 불편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는 항변까지 했을까?

 

치부를 들추고, 상대방을 면전에서 모욕하면 예나 지금이나 분노를 자아낼게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당혹감을 느껴 본 이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분노와 앙심을 품기에. 그래서 요즘은 충고도 상대방 리듬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단다. 훈계보다는 상대방 감정의 리듬에 따라 먼저 장단을 맞춰 주고 공감해 주면, 그들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자아를 쉽게 받아들인다나.

 

하지만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께는 가끔 돌직구를 날리는 충격 요법도 필요할 게다. 특히 공공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 도덕과 지도자로서의 솔선을 보여야 하는 이들에게 더 그렇다. 예수님께서도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에게 감정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상식과 기본이 무너진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인이 보여 줄 것은,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이 아닌, 예수님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익을 해치는 악에 함께 대항하는 것이다. 믿음의 덕은 하느님께는 순종하는 것이지, 불의에 순종하고 이기적 자기애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바리사이들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으니까 자기네는 의인이란다. 회칠하여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그들의 죄는 감추어져 있다. ‘남 심판하는 이도 그들과 같을 게다. 그들은 남의 어떤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기에.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쾌나 있었다나. 그들이 오늘의 유다교를 있게 한 장본인들이다. 바리사이의 어원은 분리하다에서 유래되었단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시키고자 애를 썼다.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에서, 둘째는 율법을 잘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율법 준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 대중과 만나는 것까지도 꺼렸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상당히 인정받았다. 아무튼 그들은 법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하느님의 사랑에는 소홀함을 드러냈다.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을 깨닫지 못하였던 거다.

 

누구나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힘이 실리지 않는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기에. 교회 일은 관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관리하기를 좋아하는 어쩜 또 다른 현대판 바리사이가 아닐까? 소수의 정직한 이가 다수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살려낼 수도 있는데, 그런 이가 바로 우리였으면 참 좋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바리사이,율법 교사,십일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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