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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1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12 조회수1,412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갈라 5,18-25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20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21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복음 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

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벌건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서

무엇을 찾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너무나 궁금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특정한 누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떤 사람들을 찾습니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으려고

 등불을 켜들고 헤맸지만

한 사람도 없네요.”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다운 사람은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내가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시련을

외면하는 것 역시도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만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주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보고 만족하실까요?

결국 자기만의 만족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정말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주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여라.”

라고 시작하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심 행위에만 마음을 쓸 뿐

사람들에게 참된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나

하느님의 사랑은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까지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절대로

만족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비로소 우리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때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가족이 되면

되는 거란다.

(모리 에토)

디오게네스의 등불.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조선 시대 초기에 청렴함의

대명사이었던 맹사성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있으면서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선비가 와서는

맹사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보시오, 노인.

지금 건넛마을에

급한 일이 있는데

보다시피 내가 새 버선에다

 새 도포를 입어서 개천을

건너기가 곤란하니 나를 좀

 업어서 건너가게 해주시오.

 그러면 오늘 낚시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은 주겠소.”
맹사성은 “제가 노인이라

기운이 많이 모자라지만,

어디 이리와 업히시오.”

라고 말하면서 젊은 선비를

업어서 강을 건너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물었지요.

이 젊은 선비는

 “여기 맹사성 정승 대감이

내 부친 친구이신데,

벼슬 자리 하나

부탁하러 갑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맹사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양반 헛수고하러

 가지 마시고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선비가 왜 그러냐고 하자,

그때서야 맹사성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선비는 너무나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가고 말았지요.
이렇게 겉모습만 보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 능력과 재주,

외모 등의 겉만 보고 쉽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스스로도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겉모습 대신

속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까요?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앞선 젊은 선비처럼 놀라고

부끄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경기도 광주의 맹사성 선생님의 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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