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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2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21 조회수1,10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페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 루카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

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관계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분명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관계가 정답일 텐데,

 사랑보다는 미움의 관계

그리고 일치보다는 분열의

 관계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 사랑의 관계, 일치의

관계를 만들지 못할까요?
첫 번째 원인은

‘죄’에 있다고 봅니다.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죄’로

인해서 관계가

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듯 합니다.

이 두 개의 원인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고,

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에 대한

 판단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강약의 차이

없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히

좋은 관계인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렇기 때문에 두 번째 원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딸이 아버지에게

학창시절에 받은 상처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아빠는

제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때 아빠는

늘 성적 얘기만 했었죠.

따뜻한 사랑에 목말랐는데

공부에만 허덕이게

하셨단 말이에요.”
이 아버지는 이 말에 무척이나

서운했고,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즉, 나름대로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었다고,

또 어떤 아빠도 완벽할 수 없는데

왜 너는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냐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순간 이런 말은 오히려

큰 실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딸이 틀렸다는 말이 되어서

더 큰 상처만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서

이렇게 말한 뒤에,

이 부녀는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 때문에 네가 아파했었다니

정말로 슬프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단다.”
상대방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조건 맞다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마음 때문에

그렇겠지만, 또 하나는

나만 맞다는 생각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재판관 앞에 갈 때 고소한 자와

어떻게든 합의를

 보도록 힘쓰라고 하지요.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합의가 가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상대방이 맞다고

이야기해주고 이해하려고 할 때

 합의도 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나의 기준에

 맞춰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삶이 정각에

출발하는 건 아니야.

모든 삶이 정각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지.

(칼 필레머)

우리는 왜 올바른 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까요?

있는 모습 그대로

(에리히 프리트)

“바보 같은 짓이야.” / 이성이 하는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이 하는 말입니다. 
“불안한 일이야.” / 계산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네.” / 두려움에서 나온 말입니다 
“절망적인 일이군.” / 통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소로운 일이야.” /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솔한 일이야.” / 신중함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야.” /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디서 나온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밝은 낮보다 어둔 밤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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