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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2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23 조회수1,411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23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제1독서 이사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제2독서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불한당이라는

단어를 아실 것입니다.

남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에서 불한당의

한자 풀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불한당(不汗黨)은 아닐 불,

 땀 한, 무리 당을 쓰더군요.

 즉, ‘땀을 흘리지 않고 무엇을

얻으려는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쓰지 않고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니 남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남을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 사람이

불한당이 되는 것입니다.
불한당의 한자 풀이를 보니까

주변에는 불한당이 참 많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땀 흘리지 않고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불한당이니까요.

사람들이 구직할 때의 조건으로

내거는 것 중에서 첫 번째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임금이라고 하더군요.

힘들지 않지만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가장 최고의

 직장이라는 것입니다.

불한당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아침마다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땀을 흘리지 않으면

운동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

운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운동기구를 가지고서

장난 식으로 들었다

놨다고 해서 운동이 되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운동을 해야 땀이 나면서

건강하게 됩니다. 만

약 땀을 하나도 흘리지 않겠다고

하면 몸이 튼튼해지고

건강해지길 포기해야겠지요.
어떤 일이든 힘이 들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땀을 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원하는 바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면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땀을 흘리는

노력을 기울일 때 정말로

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전교주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에만 집중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내려 주시길

주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약간의 노력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한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주님 앞에 선

‘불한당’이 아닐까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서

복음을 전하는 노력에 힘을

쏟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내려보낸 이유는,

누구나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외수)

갑곶성지의 기도틀.

많은 이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추기경 명단에 오른

알바니아 은퇴 사제 시모네 신부

(평화신문)

교황을 울린 88살 신부가

추기경이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 발표한

새 추기경 17명 명단에 알바니아의

 은퇴 사제 에르네스트 시모네 신부가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프랑스 신학자 이브 콩가르 등

몇몇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신부에서 주교를 건너뛰고

바로 추기경이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시모네 신부는 2년 전 교황이

 알바니아를 사목 방문했을 때,

공산 정부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은 체험을 발표해

교황을 눈물짓게 한 인물이다.

그의 감동적인 신앙고백이 끝나자

 교황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가가

인고의 가시밭길을 헤쳐온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단상에서

1분 가까이 부둥켜안고

무언의 위로를 주고받았다. 

그는 ‘종교의 씨’까지

말려 죽이려 한

공산 통치하에서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18년 동안

강제수용소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사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63년 성탄대축일

미사 직후 정보원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암살당한 전임 대통령을

 미사 중에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다”

고 발언한 것이 죄목이었다.

악명 높은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종교 말살 정책을 펴던 시절이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얼마 뒤 중노동 형으로 감형됐다.

 노동수용소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에도 힘겨운 곳이다.

하지만 동료들을 모아

몰래 미사를 봉헌하고,

아픈 이들을 찾아다니며 돌봤다.

절망뿐인 잿빛 수용소에 희망의

빛을 비춘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수감자들 시위에 연루돼

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동료들의 탄원 덕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공산 정부가 몰락한 1990년에야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교황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수감자들)을

 도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추기경 서임은 교황이

공산 치하에서 희생된

 알바니아 성직자들에게 바치는

경의(敬意)라는 의미도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힘든 노동수용소에서도

영적 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교황님과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교황은 안경을 벗고 울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무언의 위로를 주고받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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