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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2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27 조회수1,63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페 6,10-20

형제 여러분,

 10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12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8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19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

20 이 복음을 전하는 사절인

 내가 비록 사슬에 매여 있어도,

말을 해야 할 때에

이 복음에 힘입어 담대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복음 루카 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담론’이라는 책에 독버섯

이야기를 소재로 한

외국 동화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을 하던 중에 버섯이

모여 있는 군락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 중의 한 버섯을 가리키면서

 “얘야, 이건 독버섯이야.”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말에 이 독버섯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어떤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버섯 친구가 여러 말로

 위로하다가 최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적습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버섯의 존재 이유는

버섯의 시각에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 이유 역시

남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 ‘나’의 시각에서 판단해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의 논리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의

적대자였는데 말이지요.

런데 어제 복음 말씀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자신들의 위치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첫째의 위치였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의 위치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자신들이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위하는 척

하면서 얼른 이곳을

 떠나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나’의 논리로 예수님께

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이런 논리에

휘둘렸다면 어떠셨을까요?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바리사이들의

논리에 흔들릴 주님이 아니시지요.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야 말로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집은 버려질 것이고,

 오로지 주님의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음을 전해주십니다.
그 어떤 논리에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일에 충실하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우리 자신은

얼마나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남의 논리에 흔들리면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의 꿈을

격려하는 것은

그 영혼을 돌보는 것이다.

(존 맥스웰)

예루살렘 정경입니다.

늑대와 어린 양

(‘따뜻한 하루’ 중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호통을 쳤습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르신 잡숫는 물을

 왜 흐리고 있느냐?"
그러자 어린 양은 눈을

껌뻑이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르신보다

더 아래 있는데 어떻게

물을 흐린단 말씀입니까?"
할 말이 없어진 늑대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다시 호통을 쳤습니다.
"지금 보니 작년에

날 욕하고 도망간 녀석이

바로 너였구나!"
그러자 이번에도

 어린 양은 눈을

껌뻑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또 할 말이 없어진

늑대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날 욕한 놈은

네 형이겠구나.

네놈의 형이 날 욕한 대가로

 널 잡아먹을 테니

원망하지 말아라!"
결국, 늑대는 말 같지도 않은

 황당한 소리로 어린양을

잡아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글로

라퐁텐의 우화

 ‘늑대와 어린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방송을 보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되는 황당한

소리들이 실제의 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더욱 더 많이 기도해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황당한 소리에 아픔을

겪는 이들이 생기지 않기를,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지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이

 밝혀져서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눈물성당.

지금 우리를 보시면서는 어떠실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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