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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참을 찾으시는 주님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29 조회수1,84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31주일


<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복음: 루카 19,1-10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 (1606), 톨레도 주교좌 성당


 

과거의 잊혀진 기억을 되짚어가는 영화 백트랙의 줄거리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잠깐 눈을 판 사이 딸이 교통사고로 죽은 아픔을 겪고 있는 신경쇄약증이 조금 있는 정신과 의사 피터입니다. 자신을 찾아와 상담을 받는 환자들은 모두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1987년의 오랜 과거만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상담 받던 한 우울증 걸린 여자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야!”라고 하며 자기를 공격하려 덤벼드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에 갑자기 자신 환자들의 기록을 살펴보니 모두가 1987712일 피터의 고향에서 발생했던 기차사고의 희생자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은 이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터는 고향으로 내려가 당시의 일을 기억 해보려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사춘기 때 자신과 친구가 산 속 자동차에서 남녀가 둘이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그 장소로 갔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자전거를 기찻길에 세워 놓았었는데 그만 기차가 그 자전거를 밟고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자신에게 살아있는 감정을 주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그 죽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잊어보려고 하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열차 선로를 바꾸는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기차가 전복되고 난 후 그 작은 집 안을 보았더니 경찰이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를 폭행하고 있었고 그 아이가 살려달라며 몸부림치다가 선로를 바꾸는 레버를 당겼던 것입니다. 기차는 피터와 친구의 자전거 때문에 전복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가 한 여자아이를 폭행하다가 생긴 사고였던 것입니다. 피터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을 지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결국 그에게 나타났던 혼령들이 이 모든 일의 책임이 피터가 아니라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고 그를 징벌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현대 신앙인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왜 뜨겁지 못한 걸까?’를 생각하다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자신의 비참함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피터는 자신의 비참함을 보려하지 않고 이웃을 대하니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굉장한 부자가 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싼 가격에 사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경매를 담당하던 사람은 값이 가장 안 나가는 것부터 경매에 내놓기 위해 부자의 물건들을 뒤졌습니다. 마침내 한 구석에 먼지가 쌓은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보였습니다. 먼지를 털고 안을 열어보니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습니다. 가격을 5만원부터 불렀습니다.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4만원. 3만원. 2만원. 만원으로 내려갔는데도 그것을 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그 바이올린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 백발노인이 앞으로 나오더니 그 바이올린의 선을 조이고 음을 조율한 다음 정말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버려진 바이올린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그 바이올린은 그 값을 인정받아 5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십니다. 어떤 것이 그 값이 치러지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신이 나서시어 그 합당한 값이 치러지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함을 지닐 위험성이 가장 많은 이들이 모태신앙들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강요로 큰 죄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당이라도 빠지면 매우 큰 벌을 받습니다. 5백 원짜리 과자를 훔치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5만원어치보다 더 크게 혼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은 특별히 큰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작은 죄도 충분히 보속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나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럴지라도 속으로는 예수님은 죄를 많이 짓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주님 앞에서 합당한 사람으로 설 수 있다고 믿기에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비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돈을 쫓는 사람의 대명사인 세리였습니다. 돈이 자신을 이 세상에서 무언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면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서 비참을 발견하였습니다. 돈과 쾌락에 신물이 납니다. 자신이 쫓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더 이상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아니면 그 비참함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시는 이유는 그 비참함을 쉽게 발견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돌아온 탕자에서 큰아들처럼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죄를 지어보고 그 죄의 노예생활에서 제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비참함을 발견한 동생이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참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치 아버지처럼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뱀이, 그 자아가 나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통을 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비참함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오로는 자신의 비참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3-24)

 

이렇게 자신의 비참함을 토로하는 이에게 주님께서 참 위로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비참함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없애주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 비참함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영영 문을 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대화를 하던 사마이라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며 그 여자가 남편에게서 행복을 발견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 허사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비참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지참금처럼 소중한 보물이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접근불가의 무엇이 되십니다. 자캐오는 키도 작고 주님께도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주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했고 예수님을 당신으로 그 비참함을 벗어나라는 자캐오의 마음을 본 것입니다. 이에 바오로도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내 비참함을 모르면 감사도 나올 수 없습니다. 나를 어디에서 구했는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나의 비참함을 더 크게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는 시간입니다. 이에 의로우면서도 모든 고통을 받고 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 반드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비참함을 절실하게 느끼려는 노력을 해야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제가 유죄라면 저에게는 불행이고 무죄라 해도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수치로 가득한 저는 저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10,15)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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