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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30."자캐오 야 얼른 내려 오너라"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30 조회수1,203 추천수0 반대(0) 신고

루카 19,1-10(연중 31주 주일)

 

 

 

   오늘은 연중 31주 주일입니다.

 

   가을이 깊어 갑니다. 회한과 감사로움으로 가을의 가슴이 물들어 갑니다. 지는 낙엽이 대수롭지만은 않습니다. 뒹구는 낙엽이 발길에 와 닿으면, 달려온 시간을 절로 뒤돌아보게 됩니다. 자비가 익어가고 회개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와 회개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회개가 낳은 자비가 아니라, 자비가 낳은 회개입니다. 자비가 익어, 회개가 터져나는 신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지혜11,23)

 

 

 

   그렇습니다. 회개하였기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도록 먼저 자비가 베풀어졌습니다.자비를 먹고서야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오는 까닭입니다.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에 넘치시네.”(시 145,8)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시면서, 당신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내용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분께서 그 자비를 오늘 우리에게도 내리십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그렇게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비록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입고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캐오는 그분이 보고 싶었습니다. 민족의 돈을 착취해 떵떵거리는 부자가 되었지만, 뻥 뚫린 가슴은 오히려 허전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이 가로막은 까닭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키가 작아서인 까닭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군중을 파헤치고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죄인인 까닭이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그들의 눈 아래에서 멸시받기보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은 까닭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모욕 받는 세관들의 우두머리로, 억척같이 기를 쓰고 올라선 까닭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앞질러 가 길 앞에 있기만 하여도 오시는 그분을 볼 수 있으련만, 굳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단지 나무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나무 위에 올라가 숨었습니다. 죄지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사귀로 자신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지만, 그는 남은 보지 못하되 자신은 볼 수 있는 곳인 나무 위로 숨었습니다.

 

   죄인인 채 그분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못내 송구스런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숨어서,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앞질러 달려온 이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렇게 숨은 자캐오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던 그 사랑으로, 숨어 있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가려져 있어도 훤히 보시고, 어찌 아셨는지 참으로 놀랍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기겁할 노릇입니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듯, 아무도 몰래 나무 위로 피해 숨어 있는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어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자캐오는 그분을 몰랐지만, 그분은 그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숨어 있어도 아시고, 키가 작아도 아시고, 훤히 꿰뚫어 아셨습니다. 그의 모든 행실을 다 아시고, 따돌림 당하고 배척받는 죄인의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그 가련함도 훤히 아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훤히 아시는 그분의 아심 앞에 부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올 수가 없는가 봅니다. 그분의 그윽한 사랑 앞에 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와 지지가 않는가 봅니다.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시는 분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와 엎드려지지가 않는가 봅니다. 당신의 자비를 입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허물이 보이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아래에서 밟히면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남들 위에 있는 한은 자신의 얼굴을 볼 뿐이며, 타인의 발아래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신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오늘, 당신께서는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피해가는 자캐오의 집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당신이 품으신 그 사랑은 그토록 아득하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랑에 기대지 않고서는, 저희가 있을 곳이 없음을 봅니다.

 

   당신이 바로 저희의 거처, 저희의 집인 까닭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잃은 이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신 까닭입니다.

 

   비로소 자캐오는 주님을 뵙고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사랑에 의탁하여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저도 오늘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 생각해 봅니다.여러분은 오늘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얼른 내려오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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