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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30 조회수1,216 추천수2 반대(0) 신고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혹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출구 없는 막장 끝에 서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돌아보니 저는 젊은 시절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그런

진한 체험을 했던 기억이 아프지만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어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딴에 자존심은 강하가지고

 그 누구에도 도움의 손길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한없이 약해진

제 모습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갔습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짙은

 회색빛이었습니다.

아침이 오는 것이

그리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고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살아야하나?

오늘 하루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디로 숨어야하나?’

 걱정하는 것이 하루의

주된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해가던 제게 누군가가

기적처럼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아프냐?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다면

아프다고 이야기를 하라고!”

 저는 그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목소리는 바로

주님을 대신한 목소리였다고.

그때 저를 찾아와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고.

저는 그 고마운 분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깊은 무덤으로부터

벗어나는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자존심상하고

부끄러운 사생활인데

밝히는 이유는 이런

사랑의 스토리가

우리 사이에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난다 긴다 하지만

너나할 것 없이 우리는

나약하고

측은한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기를 쓰고 자신을 포장하고

과대평가하지만 돌아서면

허전해서

눈물 흘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필요한 것이

누군가를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내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한마디입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몸짓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역시

유사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작음’이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발버둥친 결과가 어둠의 세상

가장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역자, 매국노,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 세관장!

하는 일은 뻔했습니다.

로마에 정기적으로 할당액을

상납하려다보니 말단 세리들에게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갖은 협박과 권모술수를 통한

착취의 전문가가 되어 이 바닥에

이름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돈을 갈퀴로 낙엽 끌어

 모으듯이 모았습니다.

현찰보유액이나 부동산 소유

면적으로 따지면 유다

고관대작 못지않았습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런 아쉬움 없이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겐

친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물론 다들 앞에서는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는

‘저런 천하의 난봉꾼,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제일 먼저 지옥 불에 떨어질 놈.’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흔처럼

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제 깊은 콤플렉스,

엄청난 부자가 되면

해결되겠지 생각했습니다.

 이 참혹한 열등감,

 깊이를 알 수 없는 욕구불만,

 억만장자가 되면

 충족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참으로 혹독하고 비루한 삶,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대체 뭔가...하며 깊은

 좌절에 빠져있던 그의 눈앞에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분’께서 자캐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던

뜻밖의 선물이

그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분으로 인해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동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로 도둑놈, 매국노, 난장이.

 ‘저 인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황홀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셨습니다. “자캐오야!”

 스산했던 자캐오의 계절이

 지나가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따뜻한 봄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다짐합니다.

“저를 찾아와주신 주님,

이제부터 저는 새 삶을 살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복음 19장 9~10절)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상담심리의 대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사람,

다정한 친구 한명이

 필요했습니다.

 별명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욕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캐오 사건은

정녕 희망의 복음입니다.

 자캐오 못지않게 숱한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희망과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주는

 기쁨의 복음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를 부르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그분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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