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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알아듣기 어려운 불의한 집사의 비유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05 조회수1,137 추천수2 반대(0) 신고

 

 

 

알아듣기 어려운 불의한 집사의 비유

 

윤경재 요셉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루카 16,1~8)

 

 

 

복음서 내용 중에는 현대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불의한 집사의 비유라고 알려진 루카 복음서 16장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 하셨을 당시 청중은 고개를 갸우뚱 하였을망정 지금 우리처럼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수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빚진 사람들에게 빚 문서 내용을 고쳐 쓰도록 권유하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은 집사라 할지라도 계약 문서를 둘이서 합의하에 위조한다는 행동이 현대인의 법 감정에는 맞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영리하게 대처하였다고 칭찬 하는 주인의 처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반전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대목에 접근할 수 있는 유대인의 율법의 내용이 있습니다. 유대인 율법에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런 관습은 현재 아랍 민족에게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 율법에 Riba 금지 조항이 있어서 고리대금과 이자 획득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 은행에서는 확정이자를 주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투자 수익을 배당한다고 합니다. 또 자금의 직접 대여는 율법에 어긋나며 오직 실물 거래만 유효하다고 합니다. 손실을 보더라도 보상하는 규정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당시 불의한 집사는 기름과 밀을 빌려주거나 돈을 빌려주고 계약 문서에는 현물을 빌려 준 것처럼 거짓으로 작성하고 또 이자와 자신의 몫을 미리 계산하여 어마어마하게 부풀려 적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빚진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불만이 비등했고 결국 주인의 귀에까지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자를 금지하는 율법을 지키려고 했기에 금전이나 현물을 빌려주었을 때 손해가 나더라도 동족을 돕는다는 의로움을 더 크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익을 바라고 그런 행동을 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들은 집사는 머리를 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결국 주인과 빚진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은 체면을 차릴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이자와 자신의 몫을 빼고 원금만 문서에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당장은 줄어들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빚진 사람들이 옳게 대접해줄 것이기에 전혀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율법을 지켰으며 원금도 손해를 보지 않은 셈입니다. 게다가 불의한 집사를 공정하게 다스려 훌륭한 처사를 하였다는 평판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일거양득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명예까지 받은 셈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영의 부분과 이기심으로 뭉친 에고가 결합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의 존재와 크기를 잊고 에고만이 자신을 구성하는 양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고의 욕심이 손해를 보면 당장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 버립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의 근거가 영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눈사람을 만들 때 처음에 한 웅큼의 눈덩이를 꽁꽁 다져야 비로소 커다란 눈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로 받은 영을 인식하고 단단히 뭉쳐두어야 그 위에 제대로 된 에고의식이 자랄 수 있습니다.

 

영에 근거하지 않은 에고 의식은 욕심에 지나지 않으며 근거 없이 떠도는 부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의한 집사도 이자와 자신에게 돌아갈 몫을 염두에 두었기에 자신의 직분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율법 정신이 어디서 귀인 하는지 명백해졌습니다. 쓸데없는 욕망의 에고는 우리를 주인과 이웃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원흉인 셈입니다. 에고의 덫은 미래를 불확실한 것으로 짐작하고 그 불확실한 미래를 자기 손으로 담보하려는 어리석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주인의 설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 영리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버리고 타인의 이익을 배려할 때 그 대가가 덤처럼 따라올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만의 이익은 한 몫으로 끝나지만, 타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최소한 세 배 보장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어쩌면 제 설명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여기실는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셈법은 언제나 우리의 셈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죠

.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는 지혜를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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