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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6. " 그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신.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06 조회수1,145 추천수0 반대(0) 신고

루카 20,27-38(연중 32주 주일)

 

 

 

   오늘은 연중 32 주일입니다.

 

   위령성월의 첫 주일에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제1독서>의 <2마카베오>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2마카 7,9)

 

또,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2마카 7,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을 모아놓은 부분(20,1-21,4) 안에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이 길게 나오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경우,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통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수숙혼법>이란 신명기 25,5-6에 따르면,“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살아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질문에서 그들은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은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주십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히십니다. 곧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 모든 이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 곧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약속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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