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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1.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07 조회수2,194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티토 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 루카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제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요.

계시다면 이럴 수가 없어요.”

등의 원망조의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얼마나 지금의 상황이

힘드신 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자기보다 훨씬 더 잘못이 많은

사람들도 잘 사는 반면

왜 자신에게만

 이러한 고통의 시간이

주어지냐는 것입니다.

즉,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직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러한

억울함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언젠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한 아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엄마가 아이에게 같이

시장에 오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나 봅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게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사달라고 청했는데,

엄마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엄마, 미워!”를 반복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런데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사달라는

장난감과 똑같은 것이

집에 있으니 다른 것을

사라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이는 왜 엄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솔직히 시장을 함께 간 것을

 대단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은 얼마나

 약속을 잘 지켰을까요?

그런데 이 대단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대단한 것을

 한 것처럼 생각하고 한 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를

무섭게 탓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지 않나 싶습니다.

별로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또 약속을 더 많이 어기는

나이면서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야 되는 것처럼

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라고 하십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는 우리들이지요.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이 때로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도 말합니다.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새까맣게

잊어버리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살피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늘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 가득한 자비하심이

없다면 이 세상에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비하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사랑과 용서를 받는

우리인데 왜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까요?

또한 그러한 상황을 왜 내게

주셨냐면서 주님께 불평불만은

왜 이렇게 많이 던지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이렇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원한 걸 얻지 못하는 것은

가끔 뜻밖의 행운을 가져온다.

(달라이 라마)

용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벰바족의 용서

(최천호)

남아프리카 부족 중의 하나인

바벰바족 사회에는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벰바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학자들은 이 부족을 연구하여

마침내 놀라운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나오면 그를 광장

한복판에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들어 그를 둘러쌉니다.

그리고 돌아가며 시작합니다.

비난이나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닌

그가 과거에 했던 미담,

감사, 선행, 장점의 말들을

한마디씩 쏟아내는 것입니다.
"넌 원래 착한 사람이었어."
"작년에 비 많이 왔을 때

우리 집 지붕을 고쳐줬잖아.

고마워!"
그렇게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다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 명씩 다가와

안아주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용서해줍니다.

 그렇게 칭찬이 끝나고 나면

 그가 새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는 축제를 벌이고

 끝을 맺는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런 축제를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칭찬을

먼저 해보면 어떨까요?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아닐까요?

바렘바족의 용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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