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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1.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0 조회수1,50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6년 11월 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필레 7-20

사랑하는 그대여,

7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19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복음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어렸을 때 저는
밤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우선 화장실에 가야 할 때
까만 밤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지금이야 화장실이
대부분 실내에 있지만,
예전에는 재래식 화장실로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까맣게만 보이는
화장실 변기 안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기에 밤이
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이 싫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신나게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면 더 이상
놀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밤은 재미없는 시간,
 할 것이 없어서 잠이나
자야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 저에게
밤은 어떤 시간일까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가 졌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만남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진 뒤에
친구들의 만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적막한 밤에
기도도 하고 또 책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밤이 오기를
기다릴 때가 더 많습니다.
똑같은 밤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와 지금
느끼는 밤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 자신이 어떻게
밤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내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가장 좋은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두려움 속에서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 자신의 마음 상태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일까요?
불의와 분쟁,
침울함이 가득한 곳일까요?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의로움이 넘치고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곳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불의와 분쟁, 침울함을
가득 안고 살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들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들은 이 나라가
먼 훗날 이 세상의 삶을
모두 마쳤을 때에만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죽음 이전의 이 세상 삶 역시
하느님의 나라가 분명합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들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과 평화,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는 의지를 통해서만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자신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을까요?
최후의 순간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닌,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우리들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아프리카 속담)
밤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줍니다.
밤에 본 인천 답동성당.
힘내십시오.
지금의 상황을 너무나
힘들어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의
아픔을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었지요.
대화를 마치면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내십시오.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저녁에 묵상하면서
낮에 있었던 이분과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문득 “힘내십시오.”
라고 말한 저의 마지막 말이
과연 이분에게 정말로
 힘이 되었을까 싶더군요.
 힘내라고는 했지만
사실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로라고 건넨 말이었지만,
이분은 지금까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힘을 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더 힘을 내야 하는데,
힘을 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힘들어하고 계셨는데 말이지요.
따라서 “힘내십시오.”라는
말이 얼마나 힘을
더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보니 힘이 되지 못하는
 말을 할 때가 정말로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많은 아픔 속에
있는 분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요?
어쩌면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함께 하겠다는 뜻으로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이 힘을 낼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요? 
 
성 대 레오 교황 학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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