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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외상으로 드리는 기도 마저도 들어주십니다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2 조회수1,051 추천수4 반대(0) 신고



 

외상으로 드리는 기도 마저도 들어주십니다

 

  - 윤경재 요셉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1~8)

 



 

 

 

동양에서는 본래부터 인간에게 하늘의 명령(天命)’이 정보로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인체가 DNA로 정보를 저장하여 자손에게 유전으로 물려주고 그 정보의 내용대로 인간의 모습과 성향이 발현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감추어진 정보를 인간이 알아채는 걸 지(知)라고 불렀습니다.

 

그 천명의 정보는 지구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특성을 갖는 것과 비슷하게 사람 안에서는 네 가지 단서(四端)’로 압축되어 있다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저절로 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사단은 봄의 덕인 , 가을의 덕인 , 여름의 덕인 , 겨울의 덕인 입니다.

 

그 사단 중에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의 덕성이라고 공자는 보았습니다. 가을의 덕인 는 가을에 걷어들인 풍성한 수확물을 각 사람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나눠주라는 데서 출발한 정신입니다.

 

공자께서 의 덕성을 후세 사람들이 잘 인식하도록 명확하게 정의하셨는데 자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타인에게 시행하지마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상 의로움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고 간결하며, 내용을 포괄적으로 정의를 내리신 분이 없습니다. 절대적 기준을 타인이 아니라 자기에게 둠으로서 누구나 쉽게 상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감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인류 최초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도 를 기본으로 하여 법체계가 성립된 것입니다. 앉아있는 태양신 하마스에게서 함무라비 왕이 서서 법과 왕권을 수여받는 장면이 흑요석 위에 부조로 새겨졌습니다. 그 아래 282개조의 법률과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 법이 쐐기문자로 가득 적혀있습니다.

 

법률은 두 사람, 두 집단 간의 이익이 상충될 때 그 경계를 정하고, 한 쪽에게 억울한 심정이 들지 않도록 하며, 늘 일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게 미리 정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인지라 늘 공정하고 억울하지 않게 적용되기 어려운 게 또한 법입니다. 재판관은 우선 개인의 양심에 투철해야 하는데 자신의 편의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불공정한 판결을 내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도 공정한 인품을 지닌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고 소개됩니다. 성경에서 지혜의 근본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에 있다고 곳곳에서 찬가처럼 부르짖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전혀 지혜롭지도 인자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뒷돈을 쓰거나, 외압을 가하거나 하여야 합니다. 인정과 정의감에 호소해서는 움직여지지 않을 위인입니다.

 

모든 걸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손해 볼 것 같다는 두려움과 불쾌감을 심어주는 게 정답이라고 합니다.

 

과부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가장 힘없고 가난한 부류입니다. 그러니 그가 시도해 볼 만한 일은 뇌물도 배경도 아니라 간절함뿐이었습니다. 간절함은 행동으로 들어날 때 남을 움직이는 영향력이 생깁니다. 정의롭지 못한 재판관도 귀찮음에는 자유롭지 못 한가 봅니다.

 

그러니 공정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쉴 틈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간절한 청원을 모르는 체하실 리가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꼭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아무 소용없다고 자포자기도 합니다. 자신의 기도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거래가 아닙니다. 기도는 사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를 말합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처럼 주어가 주님이 되어야 하고 동사가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당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의 기도는 동사를 주님께 돌리고 맙니다. 자신은 손을 놓고 기다립니다. 주어의 몫을 쉽게 자신이 차지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흔히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를 ~을 할테니 들어 주세요 하는 '거래의 기도', 이번에 ~을 해주시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외상으로 바치는 기도'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바치는 '거래의 기도'도, '외상으로 바치는 기도'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어리석고 나약하다는 것을 수긍하면서 최선을 다해 외상 빚을 갚고 공정 거래를 완수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그런 유치한 기도마저도 놀라운 응답의 효과가 있었음을 저는 고백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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