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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눈먼 이를 치유하시는 기적에 담긴 의미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4 조회수1,514 추천수4 반대(0) 신고




 

눈먼 이를 치유하시는 기적에 담긴 의미

 

- 윤경재 요셉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루카 18.37~43)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는 구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기 위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또 특정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장면도 여러 군데 나옵니다.

 

마태오복음서에서 특히 자주 나오는데 9장 길 가시는 도중에, 20장 예리코에서, 21장 성전에서, 세 번씩이나 특정인을 치유하시는 기적이 벌어집니다. 독특한 것은 9장과 20장에서는 두 사람이라고 복수인을 언급하며, 21장에서는 ~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아마도 저자가 기적의 증인을 염두에 두는 유다인의 특성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벳사이다와 예리코에서 한 번에 한 명씩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리코에서는 그 눈먼 이의 이름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이며 눈먼 거지라고 정확하게 직업과 이름을 언급합니다. 그를 한 인격체로 취급한 것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예리코에서 한 번만 언급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9장 전부를 할애해서 태생 소경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다루는 데 저자의 신학적 의미가 깊이 담겨있습니다. 진리의 영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신학적 숙고를 통하여 하나의 표징으로 삼은 것입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는 기적이 공관복음서 모두 나오는데 그 자리가 세 번째 수난 예고 바로 뒤라서 어떤 신학적 의미가 담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적 소경이 보아도 보지 못하는 지적, 영적 소경보다 오히려 더 낫다는 역설을 상기시키는 장면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언급하는 바르티매오라는 이름은 풀이하면 존경과 명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르가 아들을 뜻하고 티매오가 명예를 뜻합니다. 거지라고 하면서도 굳이 훌륭한 이름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벳사이다의 치유에서는 사람들이 고쳐달라고 눈먼 이를 데려왔고 또 치유하신 뒤에는 그를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와 달리 바르티매오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ㄱ)주님, 다윗의 자손이라 호칭하며, (ㄴ)다시 볼 수있기를 간절히 청하였고, 치유를 받은 뒤에는 (ㄷ)주님을 따랐다.라고 세 가지 의미를 나열하여 그가 최상의 명예를 얻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봄따름의 의미에 방점을 찍어야 세 번째 수난 예고 바로 뒤에 배치된 까닭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눈먼 이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역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에 이런 글귀를 써놓은 팻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그가 하루 종일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동냥 그릇에는 가끔 딸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 몇 닢이 전부였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젊은이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깨끗한 종이를 구해다가 글씨를 쓴 다음 팻말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딸그락 거리는 동전 소리 대신 지폐가 쌓였고 하루 수입이 몇 배나 늘었습니다.

 

이에 놀란 장님이 길 가던 사람에게 팻말의 글귀에 무어라고 적혀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매년 봄이 와도 꽃을 볼 수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감성과 감동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동물입니다. 관계맺음의 첫 단계는 감성의 교류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먼저 간절히 청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그를 불러 마음을 움직이시고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깊게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몇 푼 동냥이 아니라 다시 봄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감행하였습니다. 자신을 돌보던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는 대신 주님 수난의 길에 동참한 것입니다. 진정한 명예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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