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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절과 고립에서 벗어나기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5 조회수1,614 추천수3 반대(0) 신고


 

단절과 고립에서 벗어나기

 

- 윤경재 요셉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10)

 

 

저는 루카복음서 자캐오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저랑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남자에게 키가 작다는 건 약간 불편하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기가 죽고 자신감이 떨어지며, 늘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자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엄청 노력하며 살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한 남자가 그 열등감을 이기고자 운동을 열심히 하여 근육질 체형으로 만들어 키 큰 남자를 때려눕히는 환상을 갖고 있는데 그런 것을 밴텀급 신드롬이라 부릅니다.

 

세관장 자캐오도 자신의 외모 열등감을 감추고자 정말 적극적으로 살아왔을 거라 보입니다. 예수님 일행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갈 정도로 적극적이니까요.

 

그는 젊은 시절 밴텀급 신드롬에 따라 자신이 잘하는 점을 찾아 남보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세관장이라는 직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세관장은 로마 당국에 큰돈을 내고 불하받는 자리입니다. 세관장은 맡은 지역에서 1년에 거두어들일 세금을 미리 자기 돈으로 당국에 바치고 나서, 추후에 지역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어마어마한 자리였습니다. 아마 수입이 지금의 준 재벌급이 아니었을까요?

 

세리 마태오도 유다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캐오가 받은 지탄은 굉장했을 겁니다.

 

자캐오는 이제 한 남자로서 갖은 지탄을 이겨내고 성공 길에 올랐으나 그럴수록 자신이 외톨이로 살아온 처지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단절과 고립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은 순수함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이제 그는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소문에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을 용서하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한번은 예수의 무리를 몰래 밟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침 그렇게나 기대하던 예수께서 자기 동네를 지나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열일을 제쳐놓고 동네 어귀에 나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 틈에서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외면적으로 키가 작았다는 것 못지않게 내면적으로 그는 죄인이었으니까요.

 

순수함은 깨지기 쉽다는 말도 됩니다. 자캐오는 지금 커다란 위기 속에 놓였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고 자캐오는 그 손길을 힘껏 부여잡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자살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그 사건 뒤에 조사하고 분석하는 것을 심리부검이라 하는데 그 결과 첫 번째 원인이 단절과 고립감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주위 사람들에게 신호를 여러 번 보냈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다는 말이 마음 고쳐먹으면 된다.’는 위로 비슷한 충고뿐입니다.

 

의사 입장에서 볼 때 마음을 고쳐먹어라.’ 라는 말은 이제 난 네가 귀찮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 라는 말과 똑같은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달리 고쳐먹을 수 없으니까 병이 된 것인데 너무나 무책임한 언사입니다. 환자에게는 충고가 아니라 나 몰라라 하는 악담처럼 들립니다.

 

요즘에는 숫제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얼마나 고립감에 빠졌으면 죽는 순간에라도 함께할 동반자를 찾았겠습니까?

 

자살률을 낮추는 좋은 방법은 단절과 고립에서 얼른 벗어날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비슷한 고민과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이 단주모임이나 단도박모임에서 큰 효과를 내었습니다.

 

예수께서 활용하신 방법이 바로 모여서 이야기하기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주 유다인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세리와 창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고 더욱 나쁜 길로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는 예수께서 불러주시니 감개무량하고 새 세상을 맞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아무 조건도 걸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머무르시며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또 하셨을 것입니다. 딱히 가르치시거나 무슨 거창한 주제로 토론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 그러나 인간다움이 풍겨 나는 이야기를 하셨을 겁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바로 치유라는 걸 아셨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라는 지탄을 받으시면서도 초대한 그들의 환대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흥청망청 곁가지로 새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알맞게 처신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 마침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독백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군의 자손이기에 손을 내밀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어쩜 고립과 단절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과 대화할 때 서로 공유할 것이 별로 없다는 막막함에 겁내고, 외면하고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절망감을 안다면 어떤 이유라도 달고 대화했어야 좋았을 거라 후회하게 됩니다. 그 상처는 평생 지속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 주위에 외롭고 괴롭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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