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5 조회수1,442 추천수3 반대(0) 신고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

 혹시 학창시절

그런 체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이!” 혹은 “야, 너!”

라고 불렀던 기억 말입니다.

그 정도는 양호합니다.

듣기 싫은 별명을 부르면

기분은 더 나빠집니다.

“어이 땜통!” “거기 돼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는 표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친교의

다리를 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당시 교육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왜냐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자체로

아주 좋은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전 세계 살레시오

교육 현장에서는 신학기만 되면

살레시안들이 아이들 이름

 외운다고 ‘쌩고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리코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돌 무화과나무 위에

 숨어있는 자캐오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이 지닌 ‘순결함’이라는

의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수전노’, ‘죄인’, ‘민족의 반역자’,

 ‘구제불능’이라고

불렸던 그였습니다.

 희망이나 가능성, 회개나

새 출발 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캐오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신체적

콤플렉스(작은 키)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철저하게도

 세상으로부터 왕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는 오로지

돈을 벌고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만 온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예리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자캐오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한 그분의

음성에 자캐오는 지난 모든 상처가

즉시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민과 사랑이 마음이 흠뻑 담긴

예수님의 한 마디에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올렸던 세상으로부터의 장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캐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처량한 모습의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그의

내면 상태를 파악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까,

그래서 제대로 한번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캐오가

 걱정했던 일이 발생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멈춰

서시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란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멀리서나마 얼굴만

 구경하려고 했는데,

 이상하다. 왜 하필 내 앞에

걸음을 멈추시는가?

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는가?

내 꼴이 이게 뭐람.

나무 위에서. 아무래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창피 한번 당하겠는데.

 저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라는데,

내 지난 과거를 보시며 제대로

 한번 혼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의 걱정과는 완전히

 다르게 처신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복음 19장 5절)

예수님의 자캐오 집 방문을 통해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지니신

사명의 본질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죄인에게 다시 한 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이 아침,

2천 년 전과 똑같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요?

결국 구원은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에 응답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또한 구원은 한 인간이 주님의

현존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함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