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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나의 비유 뒤집어 보기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6 조회수2,080 추천수4 반대(0) 신고




 

 

미나의 비유 뒤집어 보기

 

 - 윤경재 요셉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 19,11~28)

 

 

 

미나의 비유에서 한 미나의 값어치가 얼마인지 궁금해서 알아보니 근로자 100명분 일당에 해당하는 가치라고 합니다. 최소 1천만 원이 넘는 액수입니다. 그래도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한 달란트보다는 적은 금액입니다. 한 달란트는 근로자 6,000명분 일당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역에서 걷는 헤로데 안티파스 1년 조세가 약 200달란트, 유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헤로데 대왕의 1년 수입이 960달란트였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에서는 한 미나씩 열 명의 종에게 나누어 주었고,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종과 수건에 싸서 그대로 보관만 하고 아무 일을 하지 않은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또 미나의 비유가 나오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루카복음 사가가 어떤 의도로 편집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나의 비유는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에 위치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루카복음서를 복음 선포자를 위한 교육서라고 부르는데 교회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제자들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교육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조도 내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습니다.’ 와같이 제법 강하게 변합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종은 하느님의 복음 선포를 담당할 책임 있는 제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 묵상시간에 한 형제님이 기발한 착상으로 새로운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한 미나를 투자해서 손해를 보거나 다 잃는 경우도 나올 터인데 그럼 이 주인이 무어라고 했을까? 야단을 치셨을까 아니면 그래도 칭찬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주인에게 쓴 소리를 듣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종은 주인의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가 말한 핑계를 들어보면 주인을 얼마나 오해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두렵다는 이유로 주인이 자신을 믿고 맡겨둔 자본금을 아무런 시도도하지 않고 그저 방치한 것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위장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으름은 몸을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게으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살더라도 게으름뱅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 전날 시험공부 대신에 땀을 삐질 삐질 흘려가며 책상정리를 하거나 심지어 공부방 대청소를 한다면 과연 그를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부를까요? 게으른 학생이라고 책망할 것입니다. 아무런 물음과 생각 없이 일상적인 생활을 바쁘게 사는 것도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느림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잃고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퇴보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몸이 바쁜 게으름뱅이는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게으른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미화하고 모든 탓을 남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신중함으로 돌리거나, 성격의 여유로움으로 미화하고, 경우에 닥치면 다 해낼 거야라고 합니다. 아니면 우리 집안 내력이야, 일이 바빠서 등등 다른 핑계를 댑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스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소소한 것에 매달려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게으른 종을 책망하시는 까닭은 단순히 그가 돈을 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삶을 관통하는 통찰력을 잃고서 남들의 소문에 부화뇌동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종으로서 모시던 주인의 습성과 인간성을 몰랐겠습니까? 게으른 그가 적극적으로 주인을 알려하지 않았기에 나온 오해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몰라서 못했다기보다는 삶의 타성에 빠져 진실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들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행태는 자신의 삶과 인격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신앙의 길은 주체성을 지닌 한 인격체로서 결단을 내리고, 그 결과 한 쪽을 포기하더라도 참된 길을 선택하여 누가 뭐라 해도 꾸준히 믿음의 길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길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험난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이 신앙 안에서 위장된 게으름에 빠집니다. 몸만 바쁜 게으름에 빠집니다. 교회 할동은 열심히 하나 내적 결실이 전혀 없어집니다.

 

신앙 속 위장된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살피는 각성의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질문과 좋은 답을 구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매 순간 내 모든 행위에 숨은 진실은 없는지 뒤집어 생각해보고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그 형제분의 질문대로 우리가 한 미나를 모두 잃었다면 지혜로운 주인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야단을 치고 책망하셨을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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