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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1.17 목/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정의와 사랑의 실쳔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6 조회수2,461 추천수7 반대(0) 신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기념 루카 19,41-44(16.11.17)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The lament for Jerusalem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정의와 사랑의 실쳔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탄식하십니다(19,41).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여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19,44)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로움을 지녀야 할 도시가 평화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슬프게 한 근원적인 이유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루살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교회, 나 자신과 형제자매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 곳이며 예수님 자신이 선물이자 평화로서 다가오신 곳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내 마음 안에 평화를 간직하고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꽃피도록 할 때 눈물을 멈추실 것입니다. 평화를 간직하려면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고, 평화를 보도록 눈을 떠야 하며 하느님의 가치에 젖어 평화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의 무리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였지요(19,37-38). 그러나 실제 삶은 평화와는 거리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평화란 피상적인 정적이나 고요가 아닙니다. 평화란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는 것과는 달리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선이 확인되지 않으면 정의의 실현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화도 주저이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사회상처럼, 하느님의 선이 모두에게 드러나는 공동선도 찾아볼 수 없고, 하느님의 의도 실현되지 않는 권력욕과 탐욕, 이기심에 눈이 멀어 이미 곁에 와 계신 평화의 임금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구원의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정의의 질서는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사랑에 의해 실질적으로 추진되고 사랑이 완성됨으로써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사랑으로 실행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사랑으로 오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이 사라져버린 삶의 현실과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뜻과 세상 재물에 기대어 제멋대로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삶이 그분을 슬프게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평화 가운데 머무는 평화의 도구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우리를 영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때임을 알아차려, 사랑과 정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오염되고 있는 이 땅의 어둡고 아픈 현실 한복판에서 묵묵히 사랑을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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