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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웃음대신에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7 조회수1,513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우신다. 그분께서는 웃으셨다는 말은 없고 다만 몇 번 눈물을 흘리셨다. 그만큼 예수님의 눈물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 눈물은 바로 하느님의 눈물이기에.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계약의 궤를 이곳에 모셔 온 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 곧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과 무관심은 계속 반복되고, 이 죄를 예언자들이 거듭 경고했지만, 기원전 6세기에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유배를 경험했다.

 

그리하여 다시 이 도시에 예수님께서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시려고 입성하시건만, 정작 예루살렘은 메시아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참담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쏟아 내시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셨다. 파멸의 원인은 독선이다. 유다인만이 구원받고, 율법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없다는 자만심이다. 고칠 수 있는 길은 이 시련밖에 없었다.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보속임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적 운명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나.

 

그리하여 기원후 66년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돈을 강탈한다. 이에 유다인들이 반발하자 총독은 군인들을 성전 안에 배치하였고, 유다의 저항 세력들은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바쳐진 제단을 없애고, 이를 말리던 대제사장마저 살해한다. 1차 유다 독립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식을 접한 네로 황제는 진압군을 파견하여 북쪽의 갈릴래아부터 공격을 개시한다. 그래서 67년 이스라엘 북부는 장악되었고, 69년에는 사령관 티투스(Titus)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개시 5개월 만에 성벽은 무너졌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했다. 기원후 70년의 일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일 게다. ‘선택된 민족일지라도 선민답게 살지 않으면 당연히 고통을 겪는다. 위대한 민족이라는 무늬만 믿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 도시의 현실을 자주 떠올린다. 세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는 거룩한 곳이면서도 오늘날 지독한 반목과 폭력의 상징이 되는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정녕 무겁게 한다.

 

나환우들의 섬인 소록도에 있는 성당 제대 뒷면에는 하느님의 눈물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자그마한 섬 소록도 위에 온통 붕대로 칭칭 감은 십자가가 커다랗게 서 있고 그 바다와 섬과 십자가 위로 주먹만 한 크기의 하느님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나환우들의 아픔과 고통을 당사자들보다 더 처참하게 가슴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눈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대가로 그분께서 치르시는 처절한 고통의 결과일 게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내 신앙은 옳고 남의 믿음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는지 돌아봐야 하리라. 자신만 구원된다.’라는 생각만큼 옹졸한 생각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주님이시지, ‘어떤 특정인의 주님은 아니시기에.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은 시련을 겪었다. 그분께서는 우월감에 점점 악해지는 이스라엘에게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다. 성전의 멸망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신 거다. 우리에게도 언제 이런 엄벌을 내리실지 자신의 지금의 삶의 모습을 꼼꼼하게 묵상해 봐야 할 게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우시지 말고 웃으시도록 우리의 삶을 고쳐 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살렘,예루살렘,평화,성전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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