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1.1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7 조회수1,565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묵시 5,1-10

나 요한은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돈밖에

모르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돈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 것입니다.

결국 부자는 왕 앞에 끌려 나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이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 50냥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 벌은 채찍 50대를

 맞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벌은 생마늘

50개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자는 과연 어

떤 벌을 선택했을까요?
부자는 돈이 차고 넘쳤지만

단 한 푼의 돈도 아까워하는

사람이라서 벌금은 도저히

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두 번째 벌인 채찍을

맞는 것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벌은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눈 딱 감고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요.

더군다나 마늘은 많이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 벌을 선택한 부자는

 마늘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열 개 정도밖에 안 먹었는데

벌써 너무 매워서 입도 얼얼하고,

 심지어는 속까지 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지요.

참지 못한 부자는

결국 큰 소리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늘을 이제

더 이상 먹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두 번째 벌인

채찍으로 때려주십시오.”
이제 벌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를 맞자마자

너무 큰 고통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하지만 ‘50대 꾹 참자.’

고 버텼지요.

결국 20대를 맞고는

 기절하고 말았고,

깨어나서는 도저히 맞지

못하겠다면서 결국

금 50냥을 내고서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돈을 그냥 해결했으면

간단할 것을, 돈을 아끼겠다는

 마음 때문에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을 위해서 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괜찮다는 생각들,

즉 가족도 내 이웃도 심지어

 내 자신의 희생까지도

서슴지 하고 있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평화는 점점 사라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면서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도시’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뜻이 무색하게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외침으로 계속해서

파괴되었고 후에는 로마의

점령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화려함만을 보고 있었지요.

주님의 뜻만을 철저히 따를 때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에도

어떤 이권만을 추구하는

장사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추구할 때, 평화는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평화와 함께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습니다.

지속적인 우정,

끊임없는 감동 같은.

이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을 요구할 줄 압니다.

그냥 말없이 있어 주는 것 같은

(알베르 카뮈)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우셨던 예루살렘.

행복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

(최천호)

우연히 나를 찾아온

행복(Happiness)이 어느 날

갑자기 우연(Happening)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

노력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누가 가져다주기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연(Happening)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행복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간다.

행복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선택이고

 선택에 의해 운명은 정해진다.

나의 목표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고

나의 선택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과거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선택은 곧 나의 미래가 된다.
혹시... 우리들은... 행복지수를

 부의 척도로 삼고 있는지는 않은지...
사실 많은 사람들이

행복 뒤에 물질적

뒷받침으로 생각 하고 있다.
아세요? 대한민국도

 60-70년대에는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던 사실.

그런데 지금은 행복지수가

 아주 낮다. 왜 그럴까?
여러분들의 행복지수는

어떠합니까?

혹시 지금 내가 선택하고

있는 것 때문에 그 행복지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질적 뒷받침이 행복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