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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수님의 눈물 (루카19,41-4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7 조회수2,562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수님의 눈물 (루카19,41-44)

 

 

요한 사도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일곱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들고 계신 것을 보고, 살해된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묵시록 5,1-10)
나 요한은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며 우신다.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묵시록 5,1-10)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5)

 

여기서 원로는 4장 4절과 10절에 언급된 '24원로' 를 뜻한다. '24원로'는 역대기 상권 24장 1-19절에 열거된 사제들의 24반열에 근거하여 나온 표현이며, 12와 12를 더한 수로서 묵시록 21장 12-14절에 나오는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으로 상징되는 '열두 지파' 와 '열두 사도'에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24원로''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하면서, 지상 교회(묵시록 2장과 3장)와 천상 교회(묵시록 4장과 5장)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요한 사도에게 울지 마라고 명령한 뒤, 요한 사도가 울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곧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에 해당하는 '호 레온 호 에크 테스 필레스 이우다' (ho leon ho ek tes phylles Iuda ;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라는 어구는 분명히 창세기 49장 9절에 언급된 야곱의 축복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야곱은 유다를 향해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하고 축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유다 지파에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서 실제로 에제키엘 예언서 19장 2절, 3절, 5절, 6절남부 유다의 왕실을 '사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것은 명확합니다" (히브7,15). 

 

또한 본문에서 '다윗의 뿌리' 로 번역된 '헤 리자 다위드'(he riza Dayid ; the Root of David)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히 이사야 예언서 11장 1절과 10절에 나오는 '이사이의 뿌리' 라는 언급과 상관이 된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이사야11,1)."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이사야11,10).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1,1) 라는 언급으로 자신의 서술을 시작하고,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로마1,3) 라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로마서의 서두를 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묵시록의 결론 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다윗의 뿌리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나 예수가 나의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에 관한 이 일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자손이고 빛나는 샛별이다" (묵시22,16). 

 

한편, 본문에서 '승리하여' 로 번역된 '에니케센'(enikesen) '이기다', '정복하다', '지우다','격파하다' 라는 뜻을 지닌 원형 '니카오'(nika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과거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승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원문에서는 '승리하여' 라는 술어가 문두에 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따라서 이 승리는 과거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록 1장 18절에서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역사적 실재로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였음 밝혔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그분의 통치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그 책을 펴며, 그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묵시록 5장 1절에서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라고 나온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신 성부 하느님의 오른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이 '두루마리'(책)이며 또한 이 책이 안팎으로 쓰여졌고, 일곱 인으로 봉해졌음을 밝힌다. 

 

여기서 '두루마리'로 번역된 '비블리온'(bibbllion)은 본래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두루마리 책(이사34,4 ;예레36,2 ;히브10,7) 이란 뜻을 지닌 '비블로스'(bibllos)의 축소형이다. 

 

이 책은 '안팎으로 글이 적힌' 이라고 되어 있다. 동일한 표현이 에제키엘서 2장 10절에도 나오는데,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안팍으로 쓰여진 것은 그 책의 내용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뺄 수 없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함을 상징한다. 

 

또한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 묵시록 5장 1절에서 '봉인'(인)으로 번역된 '스프라기신'(sphragisin)'증표나 확증, 증거'(1코린9,2; 로마4,11),'인장'(묵시록7,2), '인장, 날인, 봉인'(묵시록9,4;2 티모2,19), '책 쓴 후에 찍는 봉인'(묵시록5,1.2.5.9; 6,1.3.5.7.9.12; 8,1)이란  의미를 지닌 원형 '스프라기스'(sphragis)의 여격이다. 

 

또한 '일곱'을 뜻하는 '헵타'(hepta)는 묵시록 전체에서 '신적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수이다. 알다시피 일곱은 창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과 관련된 '완성'의 숫자이다. 참고로, 요한 사도는 '완성' 의 숫자 '일곱'을 제시함으로써, 묵시록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넘어, 당시의 모든 교회, 심지어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저술한 것이다. 

 

여기서 '두루마리'(책)에제키엘서 2장 10절의 전통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으로 기술된 책이므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통치를 세우는데, 어린 양의 승리가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가를 드러내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수'인 '일곱'이란 숫자와 '봉인'(인) 계시의 완전성과 비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도록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묵시록에 나타난 신비한 계시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6).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드러낸다. 묵시록 5장 5절에서 요한 사도는 '사자'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면모를 그린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양'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승리가 매우 역설적인 방식, 곧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기 '어좌'와 ' 네 생물' 그리고 '원로들'에 대해서는 묵시록 4장 2절과 6절에 이미 나온다. '어좌'는 성부 하느님의 보좌(the throne)를 말하며,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하고, '원로들'(elders)'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어린양'이 '아르니온'(arnion)으로 표기되는데, 묵시록에서는 한결같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살해된 것처럼' 보인다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살해된 것'으로 번역된  '에스파그메논'(esphagmenon)'도살하다', '살육하다', '죽이다' 라는 뜻을 지닌 '스파조'(sphazo)의 현재 완료 수동형으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묵시록 5장 9절과 12절, 6장 4절과 9절, 13장 3절, 18장 24절과 요한1서 3장 12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처럼 보이는' 으로 번역된 '호스'(hos)는 많은 경우 추측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문장 속에 언급된 사람, 사물, 행위 등의 특징적인 면을 소개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로마3,7; 1베드1,19). 

 

본문에서는 어린양의 모습속에 과거 십자가 희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아마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주님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동사가 수동태라는 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관원들의 협잡에 의한 것이란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부 하느님에 의해 집행된 속죄(대속)행위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의 죽음은 유월절(빠스카절,해방절)의 희생 제사와 쉽게 결부된다(이사53,7).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요한 사도의 환시에 따르면, 어린 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다. 여기서 '뿔'에 해당하는 '케라타'(kerata)는 구약 성경에서 '능력'과 '권세'를 의미한다.(민수23,22; 신명33,17; 1사무2,10; 1열왕22,11; 시편112,9 ; 다니엘7,7.20) 

 

이것은 구약의 위경 에녹1서 90장 9절에 언급된 '뿔달린 양'의 면모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완전성', '충족성'을 상징하는 상징수 '일곱'과 더불어 사용되어,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완전함과 충족성을 상징한다. 

 

또한 '눈'에 해당하는 '옵달무스'(ophthalmus) 즈카리야서 4장 10절에 언급된 "이 일곱 눈은 바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주님의 눈이시다" 는 말씀 및  역대기 하권 16장 9절"주님께서는 당신께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슬기를 주시려고, 온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계십니다" 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눈의 수 역시 '일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그의 '전지'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묵시록 1장 4절과 5절에 나오는대로, 즈카르야서 4장 1절에서 14절에 근거한 '성령'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전지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7). 

 

'받으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일레펜'(eilephen)'손에 들다', '쥐다', '잡다' 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lambano)의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동적으로 책을 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묵시록 10장 8절에서 요한사도가 천사의 명령을 듣고 수동적으로 책을 받아든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아울러 미완료 시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을 잡고 계시는 행위를 눈에 보이듯 회화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손 위에 있는 책을 집어드는 행위는,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에 대한 권세를 부여받았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가 이미 하늘 어좌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 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 '충만한 은총'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w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에 속한'(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http://cafe.daum.net/roma3/HgBR/45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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