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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1.19 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8 조회수1,522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33주 토, 루카 20,27-40(16.11.19)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The question about the resurrection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에 있었던 부활에 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유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귀족계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 동떨어지게 살았으며 외적 신심에는 충실했지만 조상들의 전통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율법을 근거로(신명 25,5-10),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어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받아들이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으며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20,35-38)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란 육신이 되살아나고 영혼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과 영원성을 살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적인 차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묶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부활과 사후세계, 영원한 생명을 부인하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끄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고 복음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향은 필연코 물질과 돈을 중시하고 현세의 쾌락과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몰두하고 현세에 대한 애착이 커 남의 처지에도 무관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두가이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그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출발점이나 목표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상계인 셈입니다.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며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니 영원성과는 동떨어진 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니 현세 물질이나 돈,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가난하지만 영원히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일상의 죽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오늘도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이런 믿음 속에 현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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