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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저 세상 부활은 이 세상 겸손에서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9 조회수1,237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죽은 이들이 주님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은 가톨릭 교회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신앙은 단순히 죽은 신앙에 불과하다. 못된 사두가이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부활을 믿었다. 사실 부활은 신앙인들의 믿음의 바탕이자 복음 그 자체이다. 부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거고, 복음도 거짓일 게다. 죽음으로 시작된 부활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이리라.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의 부활 신앙에 일침을 가하셨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 따위에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곳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게다. 다행히 우리는 여타 동물과 달라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독서나 학습 등의 간접을 통해 익혀 나가고 이것은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완전히 상승시켜 놓는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독서와 학습을 통해서 세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신앙을 통해서는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간접 체험을 통한 삶의 질적 상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원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준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이 태어나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졌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일게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란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현세적 성공을 중시하며 영적 실재에 냉소적이던 사두가이들의 태도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사실 많은 학자와 사상가가 물질주의, 회의주의, 자연주의, 과학주의, 환원주의 등과 같은 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한 세계관을 표현해 왔다. 이러한 현대의 사조는 각 개인의 가치관과 행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 없는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계관이나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에 종속된 인생관에 따라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는 이들에게, 부활한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와 초월적 차원의 삶에 대해 눈뜨는 것을 시작부터 막고 있는 선입견,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완고함과 자기방어의 의지가 그들의 자세에서 드러나고 있기에. 이 세상에 살면서도 부활이 뜻하는 초월적 세상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기에, 신앙인들은 어쩌면 모두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진지한 의문들이 아니라 냉소적이고 완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리라.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다. 저녁에 메뚜기는 우리 내일 또 놀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니?’라며, 메뚜기의 설명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았다. 깊은 가을에 개구리는 우리 내년에 또 만나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지?’라며 개구리의 장황한 설명을 통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루를 살다 죽는 하루살이, 한 해를 살다 죽는 메뚜기는 내일과 내년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살이는 오늘, 메뚜기는 한 해 뿐이었기에. 하루살이와 메뚜기의 한계를 보면서 인간과 하느님의 눈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게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활하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 알려 주신다. 사두가이들은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이며, 메뚜기처럼 내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안다. 내일과 내년, 영원한 시간이 있다는 걸.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닌 깨달음이다.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 이 세상의 인연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될 이 간단한 걸 어렵게 생각한다. 사실 겸손해야 할 게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죽은 이가 살아난다는 믿음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게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기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부활,사두가이,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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