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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1.1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9 조회수1,100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6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묵시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복음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

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0이란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국어사전 속에는 값이 없는 수를
 ‘0’이라고 정의하더군요.
그렇다면 값이 없는 수라고 해서
오늘부터 없애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0이라는 숫자가
처음 사용된 것은
 6세기 상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0’이라는 숫자가 없었을 때에는
 그냥 빈 공간으로 썼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예를 들어 303원의 경우,
 3과 3 사이에 공간을 두고
표현을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떻게 보면
 33원인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303원처럼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
또 받는 사람 역시 정확하게
숫자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숫자 ‘0’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값이 없는 수이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1억이라는 돈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1억을 숫자로 표현하면 맨 앞에
1이라는 숫자가 붙고, 연이어서
0이라는 숫자가 8개 붙습니다.
그런데 0은 값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냥 다 없애버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1억 원이
1원이 둔갑하고 맙니다.
이렇게 값이 없는 수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숫자 ‘0’입니다.
따라서 이 ‘0’을
없어진다면 어떨까요?
세상은 상상도 못할
혼란에 빠져서 큰 일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문득 이 ‘0’이라는 숫자가
주님처럼 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내 귀에 대고 뭐라고 말씀도
해주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값이 없는 수이지만
다른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라는 존재에
큰 의미를 계속해서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과
사두가이 사람들과의
논쟁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세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편이나 다니엘서 등에
부활 신앙이 나옵니다.
 하지만 모세오경이 율법
 그 자체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이 없으니 부활 역시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의 예를 들지요.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사두아기의 주장대로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하느님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고
생각했으니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0’이라는 숫자로
 다른 숫자들이 정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주님이 계시기에 죽음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언은 가끔,
지켜보는 것은 길게.
(서권석)
값이 없어도 '0'이란 숫자는 너무 중요합니다.
홈쇼핑에서 배우는 인생철학
(김은주, ‘1cm+’ 중에서)
비 오는 날에 짚신,
햇볕 쨍쨍한 날에
우산까지 팔아치울 것 같은
 TV 홈쇼핑에서도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품질은 명품 가방
못지않습니다!
 진짜 송아지 가죽 같은
부드러운 이 놀라운 질감!” ->
어떤 것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한 팩 더해서 최대 혜택,
오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전화 주세요!” ->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교훈.
“반품은 일주일 이내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누구나 잘못된 선택에
만회할 기회 또한 있다는 증거.
어디에서는 배울 것이 없을까요?
자기 자신이 배우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분명히 배울 것이
 너무나도 가득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배운다는 마음보다는
가르치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나 지식을
가르치는 거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낮춰서 배워야 합니다.
이 배움의 끝이 있을까요?
계속 낮추고 낮춰서 돌 하나,
 풀 한 포기에서라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홈쇼핑이 정말로 많네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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