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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무릎 꿇을 때 얻는 평화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0 조회수2,51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복음: 루카 23,35-43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


 몰랭의 화가 작, (1490),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지난 서울 양천구 신월동 시장에서 발생한 아우디 승용차와 손수레의 접촉 사고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은 가운데 아우디코리아가 차주를 수소문해 차량 수리비를 전액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시 할머니와 7세 손자는 손수레를 밀고 가다 골목에 주차돼 있던 아우디 승용차의 옆면에 부딪쳤습니다. 이로 인해 아우디 승용차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놀란 할머니는 망연자실했고 어린 손주는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울먹거렸습니다. 곧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렸습니다. 당시 할머니의 손수레에는 콩나물 한 봉지와 바나나 몇 송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주변에 몰려든 학생이 휴대폰이 없는 할머니를 대신해 차량에 비치해놓은 차주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나 급히 달려온 40대의 아우디 승용차의 차주와 부인은 대뜸 할머니에게 숙이며 사과를 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지 않고 길옆에 대서 통행에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차주의 아내도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주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집입니다. 다만 그 주인을 누구로 선택할 것인가의 권한인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미 살고 있었던 라는 자아를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놈이 사라지면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 는 내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고 있던 자아이고 뱀입니다. 그놈은 두려움이란 무기로 나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만약 아우디 차주가 그 자아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 차주는 자아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웃고 한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사형수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낙원은 에덴동산을 의미하고 행복한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왕은 지배하는 일을 합니다. 낙원은 주님에 의해 지배받는 곳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피를 흘려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새 이름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우리가 피를 흘려 이웃의 이름을 지어주라는 소명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고 낙원에 살게 되며 참 행복을 누립니다.

반면 다른 사형수는 예수님께 조롱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시라면 자신도 구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잘 살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 사람이 세상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인이 자아요 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낙원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뱀의 말을 주님의 말보다 더 믿었던 첫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 친히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다시 에덴동산으로 불러올리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주인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목적을 달성하기만을 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해 밭을 갈아줄 금송아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자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은 겸손해지라고 하시고, 육신의 욕망을 이기라고 하시고, 이웃을 위해 내가 가난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십일조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모시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에덴동산에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그분에게 지배 받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다면 그분 뜻이 내 안에서 행해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일이 한 순간에 가능한 일일까요? 그 아우디 차주는 그 순간에 갑자기 그렇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낙원을 보게 된 사형수도 그렇고 아우디 차주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수없는 신뢰형성의 과정을 겪어왔던 것입니다. 마시멜로우 실험에서 보듯이 내 자아를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기까지는 그것이 행복이라는 신뢰가 쌓여야합니다. 그 믿음이 쌓이기까지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하면서 그분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우리 삶에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벽돌문화와 자연의 돌을 쌓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정을 댄 돌은 부정한 돌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인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국회의원이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연설을 하고 칭찬을 받으려는 듯 누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연설이 어땠느냐고 묻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 사람은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가 영국의 자랑 윈스턴 처칠입니다. 말을 완벽하게 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어눌한 면도 있어야 사람들이 편안합니다. 자신들이 들어갈 공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도 마치 돌과 진흙으로 엉성하게 쌓여진 제단처럼 주님께서 개입하실 여지를 남겨 놓아야합니다.

 

한번은 제가 유럽의 가톨릭 한 알코올·약물중독 치료센터인 체나콜로에서 만난 페데리코란 이탈리아 청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음악이었는데 그 음악 하는 동료들과 술과 마약을 동시에 하게 되었고 결국 노숙자의 신세까지 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강요로 체나콜로로 들어왔지만 여기서 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수호천사라고 하는 사람을 붙여주어 화장실까지 따라다니게 하는 것도 싫었고 매일 하는 미사 시간도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3개월만 견디다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3년이 넘도록 그 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사시간마다 팔짱을 끼고 맨 뒤에서 절대 무릎을 꿇지 않고 앞에서 열심히 미사 드리는 형제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도 앞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서 천천히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곳 생활이 너무 행복하여 지금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로운 줄 압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자존심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참 자유를 느끼고 참 평화를 느낍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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