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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원숭이가 아님을 증명하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2 조회수1,515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독서: 요한 묵시록 15,1-4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마시멜로우 실험은 요즘 저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죄를 쉽게 짓게 되는 우리의 본성이 바로 신뢰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상이 주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아이들이 15분 동안 마시멜로우를 먹는 것을 참아내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 것들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상에 대한 믿음이 없는 아이들은 15분을 기다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냥 먹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고 사는 이유는 이 세상 것을 버리면 얻게 될 참된 행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내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굳이 내가 행위로써 내 자신을 증명해내려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꿈을 꾸라고 강조하던 김미경 강사는 결국 안 좋은 이유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고백하는 것은 실패를 통해 강가 김미경이 아니어도 그냥 김미경으로 충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해야 그분을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성공을 쫒으라고 말하고 다녀서 정말 죄송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만들어 성공하지 않아도 누구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주님 앞에서 무엇으로 심판받게 될까요?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봅니다. 바다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불이 섞였다는 말은 지옥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유리로 이루어진 바다 같아서 어떤 이들은 그 불과 섞인 바다 위에 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입니다. 짐승은 언제 창조되었을까요? 바로 여섯째 날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짐승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는 그 짐승의 세 본성, 즉 교만, 육욕, 소유욕을 상징하는 각기 숫자 ‘6’이 셋 모인 ‘666’입니다. 사람은 이 동물적 본성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집트의 종살이입니다. 이 동물의 본성은 보통 으로 상징되는데 그 뱀을 이기지 못하면 절대 물 위에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며 물 위를 걷지만 이내 뱀의 본성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어 다시 물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본성에 취해 있는 우리의 손을 잡아 물 위로 올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이집트의 뱀(파라오)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마른 땅을 밟고 탈출시킨 사건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리바다 위에 서서 노래 부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육체의 종살이에서 탈출시켜 준 하느님의 어린양과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짐승의 노예생활을 하는 원숭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심판 때 주님 앞에서 원숭이인지 사람인지를 평가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아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은 먹느냐로 평가됩니다. 무엇을 먹느냐는 무엇을 바라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지만 그것이 나비가 되면 꿀을 먹습니다. 나비가 다시 나뭇잎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양식이 세상 것이라면 우리는 아직 원숭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말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먹는 이들입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분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미운 마음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나의 양식은 세상 것이 아닌 것이라 원숭이의 수준을 넘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면서 하느님임을 증명해주시기 위해 우리 양식이 되어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람들의 양식이 되어 그들이 더 높은 양식을 바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행복합니다.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을 시키고 보상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은 동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이것저것 자신이 한 행위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면 아직 원숭이의 수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녀인 것 자체로 모든 것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무언가를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그분께 빚이라도 갚으라는 듯이 청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어떤 흉내를 내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양과 염소가 나눠지는데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성에 의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좋은 일을 한 양들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자신이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선행을 하며 살아온 것이지 억지로 보상을 받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기 기저귀 몇 번 갈아주었는지를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집 일꾼일 따름인 것입니다. 나비는 날아다니며 그저 꿀을 먹을 뿐이지만 그 덕에 꽃들이 서로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 선행이 행복 자체일 때 그 사람은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세 번째, 원숭이는 나눌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합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행위입니다. 그만큼 그 동물에게 밥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카인은 농부로서 자신의 배만 채우는 삶을 살아가는 동물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먹으면 배고파집니다. 같은 것을 계속 먹으면 질리게 됩니다. 절대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것입니다. 그것들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이 원숭이요 카인입니다. 카인은 이름 자체가 소유란 뜻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아담에게 처음 명하셨던 주님의 이 명령이 바로 동물에서 사람의 수준으로의 삶을 살아가라는 명이셨고, 그런 삶만이 행복할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그래서 그 피와 물로써 세례를 받아 새 이름을 지니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서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바로 동물의 본성을 이기라는 소명인 것입니다.

 

검은 사제들에서 한 아이 몸속에 들어간 마귀에게 사제들은 , 이 세상에 왔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것들은 대답을 회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원숭이인 것을 증명하러 왔다.”

우리 안의 어둠은 우리가 원숭이일 뿐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절대 인간은 바다를 걸을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숭이가 아닙니다. 바다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 육체적 본성인 666을 이겨야만 합니다. ‘666’은 결코 미래의 어떤 누구를 상징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리로 덮인 불바다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모두 그 666을 이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가 다 666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66은 각자의 속에 있는 동물적 본성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원숭이가 아님을 믿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마치 마시멜로우 실험에서처럼 우리가 그것들을 참아내기만 하면 하느님 자녀의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 이겼다면,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가 원숭이가 아님을 증명하게 해 주신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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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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