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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미사강론 교황-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전문[2016년 11월 20일 주일(그리스도왕대축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5 조회수1,198 추천수2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cotidie/201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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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6 1120일 주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무엘기 하권 5,1-3

화답송 : 시편 122(121),1-2.4-5(◎ 1 참조)

2독서 : 콜로새서 1,12-20

복음 : 루카 복음 23,35-43

http://info.catholic.or.kr/missa/?missaid=7703&gomonth=2016-11-20&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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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강론 전문

http://www.news.va/en/news/pope-full-text-of-homily-for-solemnity-of-christ-t

 

2016-11-20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6 11 20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전례력의 절정이자 올해 자비의 성년의 절정입니다. 실제로 복음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의 절정으로서 예수님의 왕권을 보여 주는데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 임금” (루카 복음 23,35,37)은 권력이나 영광 없이 나타납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승리자로 보이기 보다는 정복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의 왕권은 모순적입니다. 그분의 왕좌는 십자가입니다. 그분의 왕관은 가시관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왕의 홀을 갖고 있지 않으시고 갈대가 그분의 손에 들려집니다. 그분께서는 화려한 옷도 없으며 그분의 겉옷은 벗겨집니다. 그분께서는 그 손가락에 화려한 반지를 끼고 있지 않으시고 그분의 손은 못에 박힙니다. 그분은 보석을 갖고 있지도 않으시고 은돈 서른닢에 팔리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진실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복음 18.36). 이러한 이유로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제2독서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콜로새서 1,13-14). 그분 나라의 위대함은 이 세상에서 규정하는 것과 같은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모든 것을 만나고 치유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을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 처지의 가장 낮은 것-정의롭지 못함, 배반, 버림 받음-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 무덤, 저승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왕께서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껴안고 구하시기 위해 온 세상 천지의 끝으로 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으셨고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떠받쳐 주는 겸손한 사랑으로 길을 덮으셨습니다(코린토전서 13,7 참조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 사랑만이 우리의 가장 나쁜 적들-, 죽음, 두려움-을 극복했고 계속해서 극복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위대한 하나의 승리를 선포합니다. 이 승리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왕이 되셨고 역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그분의 삶의 본성이며 끝이 없습니다(코린토전서 13,8 참조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기쁘게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영광을 나눕니다. 그분 사랑의 통치가 죄를 은총으로, 죽음을 부활로,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꿉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심을 믿으면서도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또한 왕으로 존재하시는 그분의 방법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은 허무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백성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라보는 백성들들,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먼저 백성들. 복음은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루카 복음 23.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려고 거리를 둡니다. 그들은 그들이 뭔가가 필요할 때 예수님을 무척 따라 다녔던 바로 그 사람들인데 지금 그들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환경들, 우리의 채워지지 않은 기대들을 고려해 보면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왕권에 거리를 두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휘젓고 동요하게 하는 그분의 겸손한 사랑의 그 치욕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과 함께 있는 것보다 창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떨어져 서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거룩한 백성은 그분의 실재 사랑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자 날마다 이렇게 묻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사랑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랑은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는가? 나는 내 인생으로 예수님께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다양한 개인들을 포함한 두 번째 집단이 있습니다. 그 백성의 지도자들, 군인들과 한죄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빈정거립니다.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복음 23, 35, 37, 39). 이 유혹은 그 백성들이 했던 것보다 더 나쁩니다. 그들은 악마들이 복음의 처음 부분에서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유혹합니다(루카 복음 4,1-13).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통치하기를 그만두라고, 그리고 그 대신 세상의 방식에 따라 통치하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분의 적들을 부숴버리라고! 그분께서 하느님이라면 그분의 권력과 우월함을 그가 보이도록 해라! 이 유혹은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입니다.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복음 23, 37, 39{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 자신. 너의 힘으로, 너의 영광으로 너의 승리로 너 자신을 위해 이겨라. 그것은 가장 힘든 유혹이며 복음의 처음과 끝에 나옵니다. 그분이 계시는 동안 이 공격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납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수비벽을 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오히려 계속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용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사랑이 열매를 맺으리라는 확신에 따라 시련의 이 순간을 살아 냅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이 유혹에 맞서 이기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한 분만을 바라보도록 부름 받으며 그분을 더욱 더 믿으라고 부름 받습니다. 우리 자신 조차 얼마나 자주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확신을 찾습니까. 얼마나 자주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유혹을 받습니까. 권력과 성공의 유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쉽고 빠른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일하시는지 빨리 잊습니다. 이 자비의 해가 우리에게 그 핵심을 재발견하도록 초대하며 무엇이 본질인지 그것으로 돌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이 자비의 때가 우리를 불러 우리의 왕, 부활 때에 빛나시는 한 분의 진실한 얼굴을 바라보게 하고 교회의 그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재발견하게 합니다. 교회가 따뜻하게 맞이하고 자유롭고 진실하고 재물에서는 가난하지만 사랑과 사명에서는 부자일 때 교회의 얼굴은 빛납니다. 자비는 우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데리고 가는데,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습관과 관행들을 버리도록 합니다. 자비는 모든 시대에서 변하는 권력과 불안정한 왕권에 굴복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오로지 영구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왕권을 향하게 하라고 격려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도둑은 그분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루카 복음 23, 42). 이 사람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나라를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잘못, 그의 죄 그리고 그의 고생으로 그는 예수님께 돌아섭니다. 그는 기억되기를 간청했고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했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23, 43). 우리가 하느님께 기회를 드리자 마자 그분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그분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기억은 ?우리의 기억과는 달리- 저지른 악을 기록하지 않으시고 이미 저지른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한 점수를 계속 매기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에 대한 기억이 없으시고 오로지 우리에 대한 기억,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의 우리 각자에 대한 기억만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새롭게 출발하는 것, 우리 자신을 스스로 성장시키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으십니다.

 

열려 있고 살아 있는 이 기억의 선물도 또한 청합시다. 화해와 용서의 문을 결코 닫지 않으시는 은총, 악과 불화를 넘어설 방법을 아는 은총, 모든 가능한 희망의 문을 여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공덕을 끝없이 넘어서며 그렇게 또한 우리가 희망을 불어 넣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문을 닫히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인 자비의 진정한 문이 언제나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상처로부터 시간의 그 끝까지 자비와 위로와 희망이 흘러 나옵니다.

 

너무나 많은 순례자들이 성문을 지나갔으며 매일 흘러나오는 떠들썩한 뉴스에서 멀리 떨어져 그들은 주님의 위대하신 선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가 자비로워지기 위해 그리고 또한 자비의 도구가 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자비를 받았는지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길을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그분께서는 또한 십자가 가까이에 계셨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낳으셨고 교회의 다정하신 어머니이시며 그분의 망토 아래 모든 이들을 모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성모님께서는 착한 도둑이 용서를 받는 것을 보셨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를 그분의 아들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성모님은 자비의 어머니이시며 그분께 우리는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를 의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을 향해 들어 올려질 때 응답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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