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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르코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 심판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6 조회수2,974 추천수5 반대(0) 신고



 

마르코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 심판

 

- 윤경재 요셉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오늘이 연중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비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서는게 방점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작은어머님 댁에 놀러갔다가 구교 집안이라 집안 곳곳에 성화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아주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화가 꿈에까지 나타나 가위눌린 기억도 납니다. 아마 가슴에서 빛이 나오는 벽에 걸린 예수성심상본을 보고 놀란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작은어머님께서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는데, 그 할아버님께서 무척 엄격하셔서 사촌 동생들이 외할아버님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 내고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무서웠던 할아버지와 울긋불긋하고 낯선 모습의 성화가 겹쳐 제게 어떤 공포 이미지를 구축했나 봅니다. 제가 성화를 두려워했던 이유를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 앞에 나가 낱낱이 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심판 이야기를 너무 일찍 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어린 나이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칭찬 받을 일보다는 벌 받을 짓을 더 많이 한다는 죄책감이 들었나 봅니다.

 

지금도 천주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심판에 대해서 막연한 불안을 느끼실 것입니다. 지옥과 연옥 교리를 오해하는 바람에 빚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굿뉴스 성경본문 검색란에서 네 복음서에 나오는 심판이라는 단어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마르코복음서에서는 단 한 번도 심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더군요.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출간된 마르코복음서에 심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 의미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9개절에, 루카 복음서는 6개절에 나옵니다. 생각보다 적다는 것에 놀랐습니다그 내용도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등입니다. 심판이 회개와 연결되며, 제자들에게는 심판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두려움보다 부드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서에서는 심판이라는 단어가 19개절에 28번이나 나옵니다. 요한 저자가 심판에 대해 신학적 숙고를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요한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그동안 심판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생각과 약간 차이가 남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3,17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8,15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12,47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12,48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6,11

 

요한 저자는 유다인들이 심판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유다인들 생각은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이시고, 그 심판이 자신들에게는 유리하나 외교인들에게는 불행과 저주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심판의 기준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따라 예수를 심판한다고 하며 십자가형에 처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주장에 대해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하느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느님이시며, 심판의 기준이 율법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을 심판한답시고 십자가형에 처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히려 심판받게 되었다는 신학적 결론입니다.

 

네 복음서에 나타난 심판에 관한 언급을 묵상할 때 우리도 여전히 심판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심판 날에 우리 각자는 주님 앞에 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판정을 내리시기도 전에 자기 죄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스스로 도망친다고 합니다. 창세기 38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라고 그런 장면을 확연하게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죄를 감추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구원의 손길을 마다않고 그냥 붙잡는 힘입니다. 지극히 쉽다면 쉽다하겠습니다. 주님의 뜻과 의지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공연히 지레짐작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지난날이 부끄럽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와서야 겨우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알아듣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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