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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1.2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6 조회수1,07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 묵시 22,1-7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1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2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3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6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7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 루카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제가 있는 성지에는

나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의 초

입에 들어선 요즘,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낙엽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참 예쁘고 또 운치도 있습니다.

노란색, 빨간색, 그 밖의 색깔로

 바닥을 예쁘게

칠해 놓은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쁜 낙엽들을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막상 나무 아래에까지

가보면 그렇게 지

저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보게 될 때에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분의 속사정까지 상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가

 참 많아 보입니다.

“내가 그 사람 잘 알지.”

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다가다 한두 번

만난 것이 전부인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성지 미사를 끝내고 가시는

 신자들을 향해서 인사를

 하고 있으면 종종

 “신부님, 누구 아시죠?”

라고 묻는 분들을 만납니다.

솔직히 하루에도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보니 특별한 인연을

갖고서 오랫동안 만나지 않는 이상

이름을 외우고 있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누구신데요?”라고 말씀을 드리면,

“신부님께서 매일 묵상 글을

자기에게 보내준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로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니세요?”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마 아시는 분은 알 것입니다.

 새벽 묵상 글은 신청을 하면

누구나 받으실 수 있다는 점을,

어떤 분들에게만 특별히

 보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로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의 묵상 글에서도

 썼지만, ‘알다’라는 말이

 알(卵)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겉모습 뿐 아니라 속 모습까지

알아야 진정으로 아는 것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뿐일까요?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진정한 앎이 필요합니다.

 겉모습만 멀리서 보고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세 가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주님의 자비만을 바라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기하곤 합니다.

주님의 속마음은 포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면서 주님께로 가까이 오는

우리들을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피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당장 피하고 끊어야 합니다.

냉수 한 모금보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마음을 진정시킨다.

(포르투갈 격언)

바닥에 떨어진 예쁜 낙엽...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그다지...

오 ~ 늘

(최천호)

"오늘" 이란 말은 싱그러운

 꽃처럼 풋풋하고 생동감을

안겨 줍니다.

마치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한 모금의 시원한 샘물 같은

신선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하루를

설계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송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늘 또한 어제와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미련이나 바램은 어디로 가고

매일 매일에 대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결코 살아있는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처럼 쓸쓸한 여운만이

그림자처럼 붙박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운 일들로 발목을 잡는다 해도

그 사슬에 매여 결코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오늘이 나를 외면하고

자꾸만 멀리멀리 달아나려 해도

그 "오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밝은 내일이란 그림의 떡과 같고

또 그런 사람에게는 오늘이란

시간은 희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새뮤얼 존슨은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서

 더욱 짧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늘 새로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삶의 원칙이

바로 "오늘"이니까요.
‘오늘’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 새벽에 큰마음으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오늘이 되세요.

멍석 김문태 선생님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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