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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깨어 있어야 만날 수 있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8 조회수2,57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가해 대림 제1주일


< 너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


복음: 마태 24,37-44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


 몰랭의 화가 작, (1490),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영국 더 선은 사자와 인간의 12년지기 우정을 소개했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현재 콜롬비아에서 동물보호센터를 운영 중인 애나 줄리아 토레스(52)로 그는 12년 전 여행 중 본 서커스에서 사자 한 마리를 만나게 됐습니다.

서커스에서 불구덩이를 넘으며 묘기를 보이던 이 사자는 당시 영양실조 상태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토레스는 서커스단과의 끈질긴 협의 끝에 사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 자신이 운영하는 동물보호센터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 끝에 사자는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토레스와 사자는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사자는 토레스가 구해준 뒤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감사의 표시로 포옹을 했습니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사자는 토레스를 앞발로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있습니다. 그런 사자에게 토레스는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와 인간의 감동적인 우정 스토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1969년 영국의 두 남성은 백화점에서 새끼 사자를 구입한 뒤 집에서 키웠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사자의 덩치가 너무 커져 키울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사자를 케냐의 한 국립공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두 남성은 사자가 주인을 기억하지 못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사자를 만나러 케냐로 향했습니다. 당시 밀림에서 나타난 사자는 이들을 보자 힘차게 달려와 마치 인간처럼 감격의 포옹을 했습니다. 또 사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와 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재회 모습이 담긴 영상은 2008년 유튜브에 공개돼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감동 영상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사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기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어린양이셨지만 우리가 만나게 될 그분은 사자와 같은 심판자일 것입니다. 야생 사자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사우는 자신의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그 에사우를 만나기 위해 그 은혜를 받은 것만큼의 노력으로 얻은 것들을 에사우에게 바쳐야했습니다. 이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던가에 상관없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삶입니다. 게임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했다면 아이는 엄마가 들어올 때 게임을 하고 있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노아 시대를 그 예표로 보여주십니다. 노아 시대 때 배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분명 바다 옆에 사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들은 커다란 홍수를 견뎌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나러 오시는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마지막 날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맷돌질을 하여도,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아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한 사람은 주님의 뜻임을 알고 하는 것이고 한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그 행위가 주님의 뜻에 맞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나치시대 때 히틀러의 뜻에 따라 수많은 독을 군인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명령에 항거하여 투옥되거나 죽거나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명령에는 불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 통에 죽어간 이들의 구원은 노아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 밑에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일이 아닙니다. 노아가 평생 한 일도 배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는 동물들을 살리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동물들이란 나의 도움이 없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입니다. 평생 그들을 위한 삶만 살아왔기 때문에 마지막 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주님의 뜻이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아숭배교에 빠져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갔습니다. 그 자아가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런 삶이 잠자는 삶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입니다. 동굴 우상으로도 잘 알려진 이글은 현실에 묶여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는 인간들을 풍자한 글입니다. 사슬에 묶여있는 인간들은 동굴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들을 실체라고 착각합니다.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철학자)가 동굴로 돌아와 이데아의 모습을 전하며 사람들을 각성시킵니다. 그렇지만 비루한 현실에서 안주하기를 바라는 동굴 속 꼭두각시들은 그 선각자를 죽여 버립니다.

깨어있음이란 자각과 같은 뜻입니다. 무언가를 깨어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혼자만 눈을 뜨고 있고 나머지는 장님이라면 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 바로 깨어있는 세상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동물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둠에 사는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어둠의 삶에 불을 키려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악하고 어둡습니다. 그 어둠에서 촛불을 켜는 일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사람은 밤이 와도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촛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불이 켜 있다면 그 사람에겐 밤이 없고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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