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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인 물의 세례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04 조회수1,591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가해 대림 제2주일


< 회개 하여라
 >


복음: 마태 3,1-12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


 몰랭의 화가 작, (1490),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인 물의 세례란? >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은 권태기를 겪는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 노크도 없이 들어와 녹즙을 내밀기도 하고, 아무 스스럼없이 방귀를 끼면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속옷을 갈아입는 아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내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명목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모든 여자는 다 넘어온다는 카사노바에게 돈을 주어 아내를 유혹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카사노바는 돈을 받고 아내를 유혹합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넘어오는 듯 하였으나 또 어떤 선 이상은 넘지 않습니다. 여자에게(영화에서는 강아지로 표현되지만) 상처를 받아 여자들을 증오하여 자신 또한 상처를 주기 위해 여자를 사귀었던 카사노바는 진정으로 이 여자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남편은 자신이 데리고 살던 여자가 카사노바까지도 사랑에 빠뜨릴 다른 어떤 여자와도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시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영화가 더 진행되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이 상대에 비해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까지 일깨워줍니다. 모든 관계는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끝입니다. 처음엔 상대에 비해 내가 보잘 것 없어 고마운 마음이 들지만 살다보면 상대에게 이것저것 변화를 요구하며 자신에게 맞춰줘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게 된다면 자신을 상대보다 높은 위치에 놓는 것이고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보고 있으니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심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회개란 누가 주인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당에 마치 무언가 꾼 돈을 받으러 온 표정으로 앉아있기도 합니다. 이것저것을 요구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자신이 더 해 주었으니 주님이 이젠 나를 좀 도와줄 차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당신 생명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니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자녀를 내어줄 수 없을 텐데도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귀한 외아드님을 죽여서 바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우리가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서 주님이 생각을 바꾸어 우리에게 좀 더 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관계가 깨졌음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마치 영화에서 카사노바가 네가 저 여자를 하찮게 보지만, 실상 네가 그 여자랑 살기에 합당한 인간이 아니야!’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당한 인간임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성체를 영해도 눈물도 나지 않습니다. 아마 자녀가 용돈을 모아서 무언가를 사 와도 예수님이 심장을 찢어 목숨을 내어주시는 그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보다는 더 감동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깨달아 손이 떨리게 하고 눈물이 쏟아지게 만드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이집트 왕 파라오는 자신의 땅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인 아브라함에게 당연히 자신이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부인까지도 원하고 자신의 것으로 챙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지켜주시는 하느님은 지금 파라오가 아브라함에게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가 아니면 자신은 죽을 운명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객을 전도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제대로 알아보고 자신이 빼앗은 아브라함의 아내는 물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면 성당에 무언가를 청하러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면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무엇을 더 해 드려야만 할까를 생각하면서 옵니다. 어떤 찬미를 드릴까, 이제 누구에게 선교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떤 희생을 드려야 하나만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도 아니고 성체를 받아 모실 준비가 된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이 회개의 과정을 건너뛰기 때문에 하느님을 소로 만들어버립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소로 만들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로 하느님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여물이나 주겠다는 듯이 주님을 거짓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마치 아이 대학 보내주면 감사헌금 내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깊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고꾸라져야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나중에 심판관으로 오시는 주님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례란 새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물의 세례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 회개의 세례가 이루어진 사람에게 오는 것이 불의 세례, 혹은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받으면 마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는 하루에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설교를 하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불이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불의 세례까지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불의 세례는 그 사람을 이 세상에서 소진시킵니다. 그래서 성인들이 제 명을 못 살고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를 받지 않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 불의 세례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물의 세례를 거쳐야만 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물의 세례의 방법은 바로 자신의 죄에 대해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이 세례를 위해 해야 하는 유일한 준비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교만하여 자신의 몸을 가리며 여전히 낮아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처럼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며 겸손해 질 용기가 없다면 아직 물의 세례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야합니다. 그래서 멸시받고 천대 받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만약 영화에서 남편이 나 조금씩 당신에게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 미안해. 내가 더 사랑하도록 노력할게.”라는 고백만 있었어도 사태가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내 가장 비참한 치부까지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참 기쁨과 평화를 얻기까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 참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의 뜨거움을 바로 불의 세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미적지근한 것은 물의 세례도 받지 않은 채 불의 세례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 자신을 낮춤으로써 물로 깨끗해지는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그래야 불과 성령의 세례가 얼마나 뜨거운 쓰라린 행복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은 이 불의 세례를 의미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준비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나타나엘은 거짓이 없는 자로 칭하여졌고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혹 내 안의 비밀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누구에겐가 털어놓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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