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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2.0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05 조회수1,34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복음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

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9일까지

갑곶성지를 떠납니다.

 아니 한국을 떠납니다.

멀리 캐나다 밴쿠버에서

대림특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17시간의 시차로

 새벽 묵상 글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조금 고민이 됩니다.

그곳의 상황을 잘 몰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묵상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0일 새벽에

다시 뵐 것을 약속드리면서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언젠가 어느 병원의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이지요.

아직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눈도 뜨지

 못하는 아기들입니다.

그런데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들 중에서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아기들도

덩달아 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뒤에 얼마 뒤에

자기 울음소리를

틀어주었습니다.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에

같이 울었던 것처럼,

 자기 울음소리를

듣고서도 울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를 ‘신생아성 반응울음

’이라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마음이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타인의

고통보다는 나의 고통에

더 집중하는 것은 왜 일까요?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아픔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인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본능이 사라진 것일까요?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기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만을 위한 욕심과

이기심이 다른 이들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처럼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아닌

내 이웃과 함께하는

하느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주님 앞으로

내려 보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많은 군중들로 가려져 있어서

주님 앞에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병을 고쳐주는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즉, 앞서 ‘신생아성 반응울음’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나의 이웃을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재자의 모습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목적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며,

여기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믿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웃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나만의 신앙 또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신앙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익을 생각하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갓난아기 때의 제 조카입니다.

지금은 어른이죠. ㅋㅋㅋ~

친구

네덜란드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요하네스 에른스트 딩거

(Johannes Ernst Dinger)

박사는 친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준다.”
친구가 모두

내게 도움만을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를 주는 친구도

 얼마나 많습니까?

딩거의 말처럼 사랑도

또 미움도 또 무관심을

주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는

 친구만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미움을 주고

또 무관심한 사람 역시 친구이며,

이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만 주는 친구만을

원하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활하면

내 친구의 2/3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와의 만남도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모든 이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세상이 더욱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시종직 받을 때의 사진이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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