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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엘리야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0 조회수2,061 추천수6 반대(0) 신고


 

두 엘리야

 

- 윤경재 요셉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태 17,10~13)

 

 

 

유다인 전승에 의하면 모세와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 다 철저한 야훼주의자로 우상숭배를 단호히 응징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나 메시아가 오실 때 모세와 엘리야를 동반할 것이라는 믿음이 유다 묵시문학의 전통입니다. 이런 믿음 덕분에 율법학자를 비롯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실 하느님의 통치를 가져올 엘리야 같은 예언자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자 요한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례 운동만 일으키고 무력하게도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유다인은 사라진 희망을 옮겨 죽지 않고 투쟁해줄 새로운 엘리야가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인의 이러한 생각이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그들의 시각을 바로잡을 것인데 세례자 요한이 그 엘리야였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영광만을 생각하는 유다인에게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이사 53,3~4)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 스토리에 열광합니다. 실패를 죄악시하고 성공을 찬양합니다. 그러기에 성공 스토리 이면에 숨은 험난한 과정을 소홀히 합니다. 심지어 목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부려도 된다는 오류를 범합니다.

 

가장 심각한 잘못이 바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양심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과 정의의 기준점을 자기들 임의대로 옮겨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익명의 제2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자기네들보다 월등한 문명을 자랑하던 바빌론 강가에서 주님의 땅 시온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기 민족을 이곳에 끌고 오신 고난의 이유를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님께서 이 고통 속에서 건져내실 터인데 그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고난을 견디며 속죄 제물의 역할을 하면 후손에게서 주님의 뜻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처음으로 세상 밖 구경을 하고 시야가 확 트인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으려고 했던 익명의 이사야는 인류 정신사에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사야 덕분에 사고의 전환이 유다인 공동체로 번졌습니다. 유다이즘은 이제 한 민족의 신앙 틀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의미를 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유배기간에 엄청난 저술 활동이 이루어졌고, 여러 예언자들이 나와 상처 받은 민족을 위로하였습니다. 창조 신화와 원죄 이야기가 체계화하였으며 모세오경이 정립되었습니다. 개인적 욕심에 빠지기 쉬운 정치가들이 몰락하고 참된 예언자와 사상가들이 나오자 야훼 신앙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태국의 유명한 수행자 아잔 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아름다운 유리잔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잔을 사랑합니다. 햇빛이 유리잔에 비치면 그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합니다. 내가 이 잔을 두드리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유리잔은 이미 부서진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넘어뜨리거나 내 팔꿈치에 맞아 선반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유리잔은 부서져버립니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 유리잔이 이미 부서졌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유리잔과 함께하는 일분일초는 소중해집니다.”

 

지금 유리잔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예찬하면서도, 동시에 이 유리잔은 이미 부서져 있다고 인식하는 것. 그는 양극단을 끌어안는 시각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세 차례나 고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속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울림을 오늘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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