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광야’에서 외치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1 조회수1,68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6년 가해 대림 제3주일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복음: 마태오 11,2-11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있어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영화 서편제는 소리에 미친 한 아버지와 두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대가집 잔치집에 불려온 유봉은 그 곳에서 동호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금산댁은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고 맙니다.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중 동호는 어미 금산댁이 자신의 양아버지 유봉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과 궁핍한 생활을 못 이기고 뛰쳐나갑니다. 유봉은 송화까지 자기를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송화가 아플 때 한약에 눈을 멀게 하는 약을 타서 그녀에게 먹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며 자신이 눈을 멀게 하였다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갈아가면서 첩첩이 쌓여 응어리지는 것이다... 송화야, 내가 네 눈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니 속에 응어린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시간이 지나 동호는 어느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납니다. 북채를 잡는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비와 똑같은 북장단 솜씨로 북을 치고 송화는 한을 풀어내는 소리를 합니다. 둘은 말은 안 해도 서로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 이전에는 서로 줄 수 없었던 장단과 소리를 내어주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 유봉은 소리에 미친 사람이고 두 남매는 그 희생양이었습니다. 득음을 위해서라면 칼로 저미는 한이 가슴에 맺힐 때까지 고통을 주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하는 사람이 득음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으면 어찌 소리를 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득음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광야에서 극기의 생활을 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파견되어야 했던 구약의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우상을 섬기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던 것처럼, 그래서 성령의 불이 그 산 위로 내리게 했던 것처럼, 요한도 길을 고르게 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던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어쩌면 그도 한()이 필요했는데 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 한을 쌓는 삶을 성경에서는 광야생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친다는 말은 광야로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있는 사람을 광야로 초대할까요? 바로 광야와 다른 산을 오르는 이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역할은 산을 깎아 평평하게 길을 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산을 오르는 이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걷는 이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시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을 언제까지 인도하였느냐하면 그들이 계약의 궤를 들고 물에 들어가 마른 땅을 밟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였습니다. 광야란 바로 하느님과의 계약만으로 목숨을 걸 수 있는 수준까지 이끄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준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심을 확인받으려 했던 것은 그가 의심이 들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의심하며 예수님께 가지 않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계약의 궤 안에는 이웃을 사랑하여 주님께로 이끌라는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이제 요한은 마지막 사랑을 실천하고 하늘나라로 가기 직전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한 이들이 완전히 정화하어 사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 있는 가장 작은이보다도 작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제 임무를 완수하고 하늘로 오르면 엄청나게 큰 별이 될 것입니다.

요한도 광야의 삶을 살았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혹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광야의 처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대로 하면 한을 쌓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십 년 간을 살면서 자아를 죽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과 같습니다. 자아를 완전히 죽여야만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완전히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득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이 아니라 광야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이 쌓이는 삶이어야 그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득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광야를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산을 오르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여 사목을 하였는데도 신도가 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주님께서 내가 실패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실패한 건데요?”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다. 만약 네가 목회에서 성공해서 많은 신도가 생겼다면 이는 네가 성공한 것이냐, 내가 성공한 것이냐?”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말은 주님을 위해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산을 오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 본당에 갔을 때 갑자기 신자들이 많이 늘 줄 알았습니다. 강론도 잘하고 또 친근하게 다가가서 많은 신자들이 다시 성당을 찾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매주 미사 때마다 실망을 해야만 했습니다. 속으로는 실망하지 말자라고 하였지만 실망이 되었습니다. 저도 광야를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산은 성공을 향한 여정입니다. 성공을 향해 오르는 길은 광야생활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서는 절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는 오를 곳이 없어서 떨어질 곳도 없습니다. 그저 견뎌내는 시간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었어도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더 이상 무언가를 희망할 힘도 없을 때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광야를 걷는 삶이어야지, 산을 오르는 삶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 아이들은 절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망해야만 만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요셉과 벤야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동물에게 죽은 줄 압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성공한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벤야민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아버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형제들과 함께 벤야민을 이집트 땅으로 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밖에.”

주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길은 성공의 산길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거쳐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우리를 낮추시는 광야의 길입니다. 그 한이 서렸을 때 내 안의 뱀도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는 소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됩니다. 너희도 광야로 내려오라고. 낙타 털옷을 입고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살라고. 물론 발견하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그러나 그렇게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낄 때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못된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 같지만 그 한계를 초월하면 약속된 땅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합니다. 세상에서의 경쟁과 성공에 굶주리지 맙시다.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인생은 산길이 아니라 끝도 보이지 않는 쩍쩍 말라진 광야로의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