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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화가 부족해요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5 조회수1,247 추천수7 반대(0) 신고

 

 

대화가 부족해요

 

- 윤경재 요셉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루카 7,29~3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리켜 보인 내용 중에서 가장 독특한 점이 바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따라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으로 소개해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놀란 점도 바로 아빠라는 호칭 때문에 비롯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대화 상대방이라 소개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감히 넘을 수 없는 존엄한 권위와 심판을 주재하시는 가부장적인 모습만 떠올렸습니다.

 

상담학에서 부자간에 대화가 부족한 원인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애정 표현이 없었거나,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 화를 잘 냈던 경우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감히 넘지 못할 두려운 산 같은 존재가 됩니다. 무섭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그림자에 줄곧 압도당했던 자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하고 할 말을 못하게 됩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분일 때 그리고 자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을 때입니다. 아들이 웬만큼 공부를 잘해서는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았고, 칭찬받지 못했을 때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늘 불안하고 편안히 쉬지 못합니다.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한데 뭔가를 뛰어나게 잘해야만 아버지께 사랑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좋은 학벌과 훌륭한 직장에 다니면서도 자존감이 낮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는 다자란 아들이 스스로 뛰어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느낄 때입니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이럴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간섭을 싫어하게 됩니다.

 

넷째는 아버지가 특별한 경제활동이 없었거나, 외도를 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한 경우입니다. 더군다나 가정 폭력을 행사했다면 더 심합니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상처로 마음이 얼룩져 있습니다. 가슴속 깊이 억눌러놓은 감정들을 제대로 아버지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차에 어른이 되어서는 점점 대화하기 힘들어 집니다.

 

그밖에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라든가, 서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지냈다든가, 질병이나 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겼을 때,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자간에 대화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진실한 대화를 하여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청을 묵살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워 하느님과 대화가 단절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그들에게는 위에 예를 든 심리적 요인 중에서 첫째, 둘째, 셋째 원인 모두가 해당합니다. 하느님을 그들 임의대로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위치에 모셔두고 하느님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 어둠에 갇혀 지낸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충분한데 무엇인가 훌륭한 일, 하느님께 자랑할 만한 일을 이룩해야 그나마 칭찬받을 것이라 단정 지은 것입니다.

 

자신들은 어렵사리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잘 지키고 기도도 열심히 해서 이 세상에서 복록을 누렸으니 크게 성공한 것이며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 자신들이 한 일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 자신한 것입니다.

 

이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백성과 세리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여기고 세례자 요한 앞에 나아가 죄를 씻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여태까지 자신들을 짓눌러 왔던 죄의식이 점차 엷어지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 곁에 계시다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시라는 찬미와 찬양이 우러나왔습니다. 어린 아기가 옹알이 하듯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따뜻한 미소 지으시는 하느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며 우리를 인도하신 예수님 덕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의 진실한 대화를 주저하고 차단한다면 또 다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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