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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는 물이 달라요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6 조회수1,246 추천수8 반대(0) 신고


 

노는 물이 달라요

 

- 윤경재 요셉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 5,33~36)

 

 

 

세상에는 얕은 물이 있고 깊은 물이 있습니다. 얕은 물에서는 첨벙거리고 뛰어다니며 물방울이 다리에 튀는 것을 즐깁니다. 물이 무릎까지 이르는 곳에서는, 두발로 물살을 일으키고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몸을 적십니다. 물이 더 깊어져서 배꼽까지 차오르면 다소 긴장해야 합니다. 섣불리 몸을 움직여 균형을 잃게 되면 본의 아니게 물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얕은 물에서와는 달리, 물과 더불어 노는 다양한 방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면이 목까지 차는 물속에 들어 설 때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숙연해집니다. 이제 자칫 잘못하면 물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몸 전체로 물을 느끼며 물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됩니다.

 

때로는 한 길이 넘는 물과 만나기도 합니다. 그 속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준비운동을 해야 하고, 평소에 수영하는 법과 잠수하는 법을 배워두어야 합니다. 그 깊은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이자,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관문, 우주의 중심입니다. -최수철-

 

어느 광고문 카피에서 내가 물로 보이니.’라고 외칩니다. 나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도 실은 반쪽만 맞았고 반쪽은 부족합니다. 물도 깊은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진리를 상징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물에 관한 비유와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보다 자주 나옵니다. 물이 갖는 생명의 원천 이미지와 정화의 이미지를 예수께 적용하려는 의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인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푼 것도 죄의 씻김과 재탄생을 위한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에게 세례의식을 치룬 많은 유다인이 그러한 내면적 변화 체험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운동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그가 공권력의 피해자가 되어서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한이 제창한 회개와 세례만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전부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요한과 예수님 활동의 차이점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14,8)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중점이 정의와 심판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잘못을 회개하라는 요구는 처음에 충격요법으로 다가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이웃에게 전달하고 남과 나누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요한의 설교는 대개 일회적이고 한사람에게만 효과가 미쳤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남더러 회개하라는 요청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나 잘하라는 지적을 받기 십상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측은지심과 공감에서 나왔으며, 우정과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정과 사랑은 한 사람이 변화하면 그 영향이 이웃으로 번져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받은 동감(compassion)은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을 키우고 서서히 안으로 쌓아올려 끓어 넘치게 됩니다. 마치 주전자의 물이 열에 끓으면 수증기를 뿜고, 물이 넘쳐 오르는 현상과 닮았습니다.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저항감이 없습니다.

 

예수 한 분으로 시작된 사랑의 운동이 핵분열을 일으켜 거대한 폭발을 유발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요한14,10)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는 요즘 애들 말로 노는 물이 달라요.’입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요한의 증언이 필요치 않고,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차이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물이 두려움을 느끼며 숙연하게 하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이었다면 예수님의 물은 깊이를 측량할 수조차 없는 깊은 바닷물이었습니다. 바닷물은 온갖 생물이 낳고 죽으며 생활하는 터전입니다. 생명의 원천입니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는 물입니다. 우리가 심연의 바다 앞에 서면 온갖 경외로 삶을 숙고하게 만듭니다. 아니 예수님의 크기는 지구 위 바닷물을 뛰어넘습니다. 온 우주를 담는 그릇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자칫하면 스캔들이 될지도 모르는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도 바로 두 분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을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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