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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2.2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24 조회수963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복음 루카 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납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것이기 때문에

책의 제목이나

저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주 슬픈 소설책이었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약간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가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제 마음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방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꺼이꺼이’ 소리를 내면서

 펑펑 울었던 것 같습니다.

운다고 해서 흉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가를

느낄 수가 있었지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다고 하지요.

그래서 ‘미안합니다.’는 말도

잘 못하고, 또한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에도 어색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감정의 서툰 모습은

신앙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미사할 때, 또 기도할 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아무런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상태로 오래 있는

 ‘멍 때리기 대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있으니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고 또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속 시원하게 풀어야 하는데,

스스로 억제를 하다 보니

풀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냥 점잖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웃지 않겠습니까?

 연애를 하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또 눈을 꼭 감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일열명 즈카르야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 때

반드시 바치게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가만히 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애도 자주 또 많이 해야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을 만나려 하고 또

한 함께 해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진정으로 하느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히 주일 미사 참석 한 번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할까요?

아니면 봉사활동 몇 차례로

자신처럼 열심한 사람은

세상이 없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월감을 가져야 할까요?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께 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분명히 그 안에서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 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탄생한다.

(김소연)

인천의 청라성당입니다.

엄마의 사랑

2008년 쓰촨 성 대지진

현장에서 아기를 안은 채

세상을 떠난

여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여성은 아기의 엄마였는데,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기를 위해

모유 수유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가. 살아난다면

이것만은 기억해 주렴.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아기는 커서 어떨까요?

엄마의 사랑을 기억할까요?

기억하지 못할까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기 때문에,

 엄마의 바람처럼

열심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엄마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 까지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사랑으로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대충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희생이

절대로 헛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신부님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때 먹은 안주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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