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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활인검, 사인검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28 조회수1,639 추천수8 반대(0) 신고



 

활인검, 사인검

 

- 윤경재 요셉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6~18)

 

 

 

구한말 경허 스님의 제자로 뛰어난 도력을 지니신 혜월 스님이 부산 선암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스님은 가끔 대중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셨는데 나에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활인검(活人劍)과 사인검(死人劍),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도, 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도 스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로 보여준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혜월 스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두 자루의 명검은 그야말로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천하의 명검에 대한 소문은 신도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경상남도 전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일본인 헌병대장이 바로 이 명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명검은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을 살리는 명검이 있다니 이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아닌가? 헌병대장은 도저히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곧바로 선암사로 올라갔습니다.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과 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마침 혜월 스님은 산에 나무하러 가시고 없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위태로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바로 저 스님이 활인검, 사인검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시는 혜월 선사라는 말을 시자로부터 들은 헌병대장은 우선 스님의 외모를 보고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활인검, 사인검의 명검을 지닌 선사라면 풍모부터 우선 그럴듯하리라고 상상했었는데 나뭇짐을 지고 내려온 혜월 선사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습니다.

 

스님께서 활인검, 사인검 명검을 가지고 계신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소이다.”

그러신가. 그럼 보여줄 테니 나를 따라 오시게.”

 

혜월 스님은 섬돌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셨습니다. 한껏 기대에 부푼 헌병대장도 스님의 뒤를 따라 섬돌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순간, 스님이 느닷없이 돌아서서 헌병대장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깜작놀란 헌병대장은 순식간에 축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윽고 스님이 축대 밑으로 내려와 한 손을 내밀어 헌병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방금 전, 당신의 뺨을 때린 손이 죽이는 칼이요, 지금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손은 살리는 칼이오.”

 

헌병대장은 그제서야 크게 깨닫고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돌아갔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소식을 동방박사에게 들은 헤로데는 그 어린 임금을 죽여야만, 자기 후손이 왕통을 이어가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잔혹하게도 예수 탄생과 비슷한 시기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생명을 빼앗은 헤로데의 잔혹함보다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 그런 처사를 허용하신 것 같은 하느님께 더 시선이 머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실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마태오 저자가 그런 일이 미리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슬며시 책을 덮어버리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꼬무락거리는 몸짓을 떠올리며 내 몸뚱어리는 진절머리를 칩니다. 아기를 갓 낳은 엄마들의 자그마한 꿈을 송두리째 앗아간 큰 슬픔을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 내 가슴속에는 찬바람만 붑니다.

 

?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불행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인간들의 작은 꿈을 꼭 그렇게 훼방 놓으셔야 하는가? 이런 숱한 의구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냥 흘려들어도 될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내 질문의 상대방은 누구이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질문을 제기할 상대방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의구심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지구가 돌고 있었습니다. 창공의 별들은 여전히 깜박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계절은 바뀌어도 여전히 찾아왔습니다. 내가 분노를 느끼며 항의를 제기하는 순간에도 무엇인가 일하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그분의 일 처리 방식이었지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내 질문은 실상 하느님께서 제 방식대로 일하셔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내 손에 쥐어진 칼 중 어떤 것을 휘두를는지는 바로 내 결정에 달렸습니다. 나는 헤로데가 될 수도 동방박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계셨을 뿐이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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