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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61230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30 조회수1,30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 12 30 () 가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복음 묵상

집회서 3,2-6.12-14
마태오복음
2,13-15.19-23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고, 또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초기 신앙공동체가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과정에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약속한 인물이었다는 그들의 믿음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의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그들에게 구약성서의 가치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구약성서가 이미 예고한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그분 안에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도 태어나자 이집트를 다녀오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요약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가 요셉의 꿈에 세 번 나타난 것으로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천사와 꿈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등장합니다. 천사와 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신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순종하였다는 말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되고자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인의 살인, 노아 시대의 타락한 생활, 바벨탑을 짓는 방자함 등, 불순종의 역사 후에, 아브라함은 순종의 역사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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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서는 요셉이 순종하였다고 반복해 말하면서,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순종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고 길을 떠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길을 떠나 아기 예수의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아버지가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에 아브라함의 순종이 있었듯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에 요셉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피동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면서 감행하는 하나의 모험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도 자비롭고,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도 사랑하는 노력을 하는 모험입니다. 그것이 모험인 것은 그 결과도, 그 대가도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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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게 하는 순종은 주인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수작하는 노예의 비굴함이 아닙니다. 순종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초능력을 얻어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하게 포장하고 확장하기 위한 작전이 아닙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이 있자, 곧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새롭게 출발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순종하여 그분이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그 후손들이 마음껏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었듯이, 요셉은 순종하여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을 영접하고 자라게 하여,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을 마음껏 살아 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영접하여 베풀고 나누며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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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현대 산업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가정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습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가정은 소중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 기술 산업사회는 가정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해 이 축일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길을 떠난 요셉과 같이, 우리의 가정도 말씀을 영접하여 함께 길을 떠나는 곳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어린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 따라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웠듯이, 우리의 가정에서도 생명들이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 따라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우게 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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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자기 한 사람 더 잘 되자고 노심초사하는 세상입니다. 자기의 중요성만 알고, 주변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할 때,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울 때, 그 가정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을 배웁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친구, 아버지가 실직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 집안에 환자가 있어서 우울한 친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녀들이 깨달을 때, 그 가정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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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보고, 외로운 이를 집안에 초대하여 위로하는 경우들도 우리는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고 배우는 가정들입니다. 가정은 그런 나눔과 섬김을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욕심과 허세만을 위해 살도록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공부만 잘 해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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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운 자기 주변에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장소입니다. 자녀들을 아침저녁 강제로 기도하게 하라는 성가정 축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일을 깨닫고 길을 떠나는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생명이 자라는 가정이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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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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