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그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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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7-01-02 | 조회수1,58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로 추앙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도록 촉구하는 ‘광야에서의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단다. 심지어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조차 감히 없다나. 암튼 누구나 인기를 한 몸에 받다 보면 스스로에게 착각하기가.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성찰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동트면 울던 수탉이 언제부터 자신이 울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꼴이다. 가끔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하다보면 간혹 이런 병에 걸리기도. 이는 마치 섣부른 주위의 칭찬과 인정을 착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예수님 증언의 삶이 아닌 자신이 아예 그분 위치에 올라 가있기도.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하느님만을 믿는 우리에게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일러 주는 바가 분명히 있으리라.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24-28)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은 6월 24일이다. 이때는 가장 길었던 낮이 짧아지는 그 참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탄생은 긴긴밤 동지에서 낮이 점점 길어지는 때이다. 이처럼 요한의 삶도 그의 탄생이 갖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 길을 앞서 닦고는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많은 이가 따랐기에 스스로를 내세우는 욕망이 생길만도 한데, 오히려 그 모든 영광을 뒤로한 채 그분께만 돌렸다. 심지어 자신은 그분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사람으로는 가장 낮은 마지막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보다 더한 겸손이 어디에 있을까?
사실 당대의 모든 이는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며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지언정. 정녕 그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서 단지 그분 오심을 준비하는 이라고 선언했다. 세례를 베푸는 것도 그분을 맞이하는 준비란다. 이렇게 그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그러기에 그분의 신발 끈을 감히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진솔한 고백을 마다하지 않았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의 정신으로 오로지 하느님 영광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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