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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03 조회수1,339 추천수8 반대(0) 신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 윤경재 요셉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29~34)

 

 

 

한 목동이 양떼를 몰고 다닐 때 그 무리 안에는 젊고 강한 숫양이 보조 역할을 합니다. 목자가 그 숫양의 이름을 부르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목자를 대신하여 양떼를 몰고 다닙니다. 물가로 몰고 가기도 하고, 풀밭에서 멀리 도망치지 못하게 양떼를 지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래와 위 두 질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판치는 아래 세상질서를 말합니다. ‘나와 나들이 서로 충돌하는 세상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죄는 바로 자아의 이기심을 제일로 여기는 죄입니다. 죄를 없애다라는 뜻은 치워 버리고’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부지런히 활동하며 자신의 이기주의를 치워 버리고 목자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 세상의 질서는 독재자인 나들이 무한 경쟁하며 다투는 질서로서 조작과 통제가 통치 원칙입니다. 위의 질서는 사랑과 성령이며, 연민이 통치 방식입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차이점을 인정하고 약점을 보호해주는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 두 질서 사이를 왕래하며 아래 세상의 질서를 변화시키고, 위의 질서와 조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위에서 부르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 있는 한 탁아소에서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유용한 억제기능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벌금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벌금을 부과하기 전에는 보육교사와 부모는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것이 사회규범, 즉 공공의 미덕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어쩌다 늦으면 마음으로부터 죄송스러워했습니다. 그런 미안함에 부모들은 다음부터는 제 시간에 아이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자 공공영역이 시장영역으로 바뀐 모양이 됐습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늦은 것을 돈으로 처리하면서부터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상황을 시장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벌금을 내면 되니까 이제는 늦을지 말지를 상황에 맞춰 결정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달은 몇 주 뒤 탁아소가 벌금제도를 다시 없애면서 일어났습니다. 탁아소가 공공영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부모들도 공공영역의 세계로 돌아왔을까요? 다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벌금은 없앴지만 부모의 처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늦게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벌금을 없애자 오히려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횟수가 조금 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공공영역의 규범도 시장영역의 규칙도 모두 고장 나버린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한 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공영역의 규범과 시장의 규칙이 충돌하면 공공의 규범이 밀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공공의 관계는 다시 세우기 어렵습니다. 한번 공공영역이 시장영역에 밀리게 되면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어설픈 시장규칙은 인간관계를 무너트릴 뿐입니다. 행동주의 경제학에서는 이제 합리적인 시장경제의 환상을 깨버린 지 오래입니다.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환상에 더 이상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영성은 하느님의 질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아래 세상에서도 적용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성 회복은 시장의 규칙 때문에 무너진 공공영역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을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성 운동이 마지막 남은 희망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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