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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06 조회수1,59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 윤경재 요셉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7~11)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비슷한 세례인 것 같으나 차이가 큽니다. 물은 자연에 속하는 물질로서 정화하는 이미지가 담겼습니다. 유다인은 음식을 먹을 때, 성전에서 예식에 참례할 때 물로 손과 몸을 닦는 정결례를 거행했는데 모두 물이 지닌 정화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조상 아브라함(백성의 아버지)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메소포타미아 하란 땅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한 내용을 나타냅니다. 강을 건넌다는 건 죽음을 건 모험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가리켜 보이는 땅으로 들어가고자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준 것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을 모범으로 삼은 것입니다.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는 자신이 죄를 지어 더러움이 덕지덕지 붙은 것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서약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첫째 죄를 지었으니 죽음이 마땅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그에 알맞은 행동을 보여야 하겠기에 물의 정화의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물의 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사건입니다. 즉 죄인들과 동등하게 되기 위하여,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굳이 물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1베드 3,20~21)

 

베드로는 요한에게서 받은 예수님의 세례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합니다. 예수께서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심으로 물에 뜨는 방주 역할을 하셨고, 그 뒤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몸인 방주에 들어가 무사히 죽음을 건널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도 바오로는 예수께서 물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 죄인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를 살짝 비틀어 표현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결국 예수와 하나 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하나 되셨으니 우리도 예수와 하나 된다는 논리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자연물을 이용한 상징적 세례가 아닙니다. 상징적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대체물로 가리켜 보이는 행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거나, 유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상징적 행위입니다. 물의 세례가 바로 실재를 가리켜 보이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하느님이신 성자와 성령께서 직접 거행하시는 세례입니다. 실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세례 때 새 생명을 주시는 실재입니다. 교회는 이를 성사라고 표현합니다. 상징적 행위와 엄연히 구분 지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거짓이 없는 양심의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깨달은 바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 차이를 더 큰 능력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이 둘은 아예 같은 선상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재상징은 따지고 보면 사이비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의 세례가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실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매일 매일이 기쁨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 아멘. 우리는 죽음도 이길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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