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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10 화/ 행동으로 말씀을 설명하는 참 권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09 조회수1,209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1주 화 마르 1,21ㄴ-28(17.1.10)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 1,22)













행동으로 말씀을 설명하는 참 권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신앙고백, 기도, 모세오경과 예언서 봉독, 설교 순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십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자 사람들은 몹시 놀랍니다(1,21-22). 율법과 전승을 해설하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1,22).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더러운 영’의 축출로써 공개적으로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더러운 영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1,25-26).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1,27)에 모두 놀랍니다. 어떻게 하면 더러운 영을 몰아내신 예수님의 권위를 지닐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권위를 지니려면 먼저 권위의 뿌리인 하느님과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재물이나 권력, 전통과 이기적인 인간관계에 뿌리를 둔 권위는 매우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힘을 발휘할 뿐이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삶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권위는 온갖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는 사랑과 정의와 선을 발생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한 ‘관계 맺음’과 ‘소통’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관계를 거부합니다. 거부와 관계단절은 분열과 폭력을 일으키며 살아있는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하므로 힘을 잃게 되지요.

진정한 권위는 ‘더러운 영’처럼 지식을 지식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았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는 기회로 삼아버립니다. 율법과 전승을 지식으로 해설하는 데 집중했던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말을 설명하셨기에’ 권위가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새로웠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행동이었지 새로운 지식을 말하는 언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권위 있는 것으로 바꾸는 그분의 권위는 바로 사랑의 행위, 생명과 해방으로 이끄는 행위,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기준과 뿌리를 하느님께 두고, 그분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다른 이들과 이 사회에 창조의 새로움과 해방의 장을 열어주는 권위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권위란 말은 ‘누군가를 키우다. 성장하게 하다’란 뜻이 있지요. 사람을 키우고 살리는 ‘사랑의 행동으로’ 사랑이나 복음선포를 설명할 때 우리도 진정한 권위를 지닐 것입니다.

이제 율법학자나 더러운 영처럼 지식을 지식으로 설명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처럼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행동으로 말을 증명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행복한 우리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공동선을 위해,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써야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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