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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큰 돌과 작은 돌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4 조회수1,417 추천수10 반대(0) 신고


 

 

큰 돌과 작은 돌

 

- 윤경재 요셉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돌과 두 여인이란 글에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된다고 썼습니다.

 

어느 두 여인이 노 스승 앞에 가르침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노 스승은 두 여인에게 마음속에 무거운 짐이 되는 죄가 있다면 말해보라 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가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큰 죄로 생각되어 지금도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자기 생각에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건실하게 살아 왔으니 아무 죄도 범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며 스스로 만족해하였습니다.

 

이때 노인은 첫 번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너에게 지시하니, 지금 당장 밖에 나가 큰 돌 하나를 가져오되 가능한 네가 들 수 있는 큰 것으로 가져 오너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여자에게는 너는 작은 돌들을 가져오되 네가 들 수 있을 만큼 가지고 오라.”고 말하고는 자루 하나를 건네 주었습니다.

 

두 여인은 노 스승이 시키는 대로 밖으로 나가서 큰 돌과 작은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노 스승은 이번에는 그 돌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들고 온 여인은 돌이 있던 자리를 알았기에 곧바로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한 자루 담아온 여인은 그 돌들을 일일이 찾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루를 그대로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노 스승은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크고 무거운 돌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기억할 수 있어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으나, 수많은 작은 돌들은 원래의 자리를 잊었으므로 다시 가져다 놓을 수가 없는 것이오. 큰 돌을 가져온 당신은 한때 당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고 양심의 가책을 겸허하게 견디어 왔으나, 작은 돌을 가져온 당신은 비록 하찮은 것 같아도 당신이 지은 작은 죄들을 모두 잊고 살아온 것이오. 그러고는 뉘우침도 없이 죄의 나날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졌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죄는 이것저것 말하면서 자기가 죄에 더욱 깊이 빠져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거지요.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라오.”

 

건강보험 통계에 따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옵니다. 평소에 자신이 병약하고 건강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하여 건강검진을 자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루 식사량도 알맞게 먹고 음주나 흡연을 자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해 평소에 건강을 자신하고 몸을 함부로 굴리며 건강 검진을 소홀히 한 사람은 갑자기 큰 병에 걸려 고생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병을 키웠다가 뒤늦게 발견하여 치료시기를 놓치기 때문이랍니다.

 

비근한 예로 갑상선 암 수술을 한 사람의 예상생존율이 105%로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섭생을 조심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며 규칙적인 검진을 통해 다른 더 큰 병을 예방하기 때문이랍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시는 예수께서는 앞으로 더 큰 죄를 짓지 말라는 의미로 그리 하셨습니다. 자기가 큰 죄를 지었다는 자각 못지않게 그 죄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맛보는 계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 출발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홀가분하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속죄제물을 바치는 이유도 새 출발을 다짐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의식은 늘 형식에 빠질 위험성이 큽니다. 한번 형식에 빠지면 그 형식을 잘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진심으로 속죄하는 것보다 형식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더 말을 하게 됩니다. 아는 게 힘이 아니라 아는 게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죄가 크면 속죄제물을 바치는 횟수와 양도 커야 된다고 여겼으니 그렇게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죄를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번 따돌림을 당하면 원상 복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뇌리에 각인된 낙인효과가 주는 피해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정개가 더 중요하니 질적인 변화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는 감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경험해야 힘이 생깁니다. 힘이 생겨야 지속 가능하게 됩니다.

 

또 예수께서는 따돌림에서 벗어나 뇌리에 새겨진 각인효과를 해소할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받아들여 예전의 자리로 원상회복 시켜주는 것이며, 새로운 책임 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동양의 종교와 사상은 깨달음 뒤에 밀고나가는 힘이 생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요가와 호흡법 같은 수련법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께서는 온몸의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 아버지께 다가가는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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