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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1.1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4 조회수1,08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 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복음 마르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는 공평하신

느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느님께서

공평하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찾아온 고통과 시련의

 무게를 보면서 우리들은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불공평하신 분일까요?

사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스스로를 더 큰

고통으로 밀어 넣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불공평하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어머니께서 제 위의 누나에게

무엇인가를 먹이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저는

‘불공평하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왜 나는 주지 않고 누

나만 주는 거야?

 이것은 불공평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불공평하다’라는

생각이 밤에 몰래 누나에게만

먹였던 것을 몰래 가서

 먹어치웠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날 밤 저는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제가 먹은 것은

누나의 감기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행동에 저는

불공평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행동이

정말로 불공평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만약 공평해야 한다면서

감기에 걸리지 않은 저에게

감기약을 똑같이 나눠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이상한 어머니가 되겠지요.

감기에 걸리지 않은 제게

감기약을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불공평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해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일까요?

불공평하신 분일까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스스로가 불공평한

상황이라고 단정을 짓고 남 탓,

하느님 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정말로 보기 싫었던 장면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거룩함을 위해서 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죄인이라고

평가되었던 사람들,

 즉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들

 그리고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병자들 등과

먹고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공평함은 죄인은 벌하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하느님의

공평함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공평함에

자신의 잣대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진정으로 공평하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과 아울러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헨리 포드)

어제 걸었던 제주도의 숲길.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사실 저는 2박 3일 간

제주도에 있었습니다.

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숲길이나 올레 길을 계속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생활 할지를

계획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2박 3일 동안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이 힘으로 또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어젯밤

비행기를 타고서 다시 올라오는데

 제가 탄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을 못하는 것입니다.

래서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착륙을 했지요.

그런데 착륙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문득 ‘비행기 사고가 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종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행기 사고가 내가 타고 있는

이 비행기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도 계속 이어집니다.
‘만약 내가 절대 못 고칠

불치의 병에 걸린다면 어떨까?’

이 역시 절대 일어나지 않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가까운 사람의 뜻밖의

부고 소식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험이

전혀 없어야 평온한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 역시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고통과 시련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평온한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걸었던 삼나무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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