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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사는가?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5 조회수2,613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7년 가해 연중 제2주일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복음: 요한 1,29-34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모


 벨리니(Bellni, Giovanni) 작, (1475),  피렌체 콘티니 보나코씨 콜렉션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시골에 사는 한 여학생과 도쿄에 사는 한 남학생이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몸이 뒤바뀜을 반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어느 순간 이후에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쿄에 사는 남학생은 자신과 몸이 뒤바뀌었던 그 여자가 그리워 그 여자가 사는 마을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도착해보니 3년 전에 유성이 떨어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도쿄에 사는 남자는 여자보다 3년 빠른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정확히 3년 째 되는 날 한 번 더 몸이 뒤바뀝니다. 그리고 서로 만납니다. 그때 그 여자 아이에게 이 사실을 말합니다. 여자아이는 자신도 구하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마치 아침에 꿈을 깨면 꿈이 사라지듯이 정말 빠르게 서로 몸이 뒤바뀐 순간의 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자기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해 준 아이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뛰어 내려가다가 넘어져 떼굴떼굴 구르게 됩니다. 옷은 찢어지고 무릎과 머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뛰고 있지? ... ! 그 아이...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행히도 남자아이는 그 아이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이를 기억하고 손을 펴 손바닥을 쳐다봅니다.

나 너 좋아해!”

이름을 써 준 것은 아니지만 왜 자신이 그렇게 피멍이 들어가면서까지 마을에 가서 모두 피신해야 산다고 소리쳐야 함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소녀는 다시 일어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피신하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이 그 소녀의 확신에 눌려 피신을 하게 되고 그날 밤 그 마을은 다행히 거의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야하지? 열심히는 사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오는 지 모를 공허함. 그렇습니다. 라는 질문에 먼저 스스로 대답하지 않으면 삶은 텅 비고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집니다. 이유 없이 하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유를 알아야 무기력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중대한 질문에 스스로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들은 대부분 이랬습니다.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죠.”

먹기 위해 삽니다.”

자아 성취를 위해 삽니다.”

가족을 위해 삽니다.”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그런데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투브를 찾아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법륜스님이 해 놓으신 것에 수십만 건의 최다 조회수를 올리는 답변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사는 건 밥 먹으니까 사는 겁니다. 때가 되면 죽는 거고, 그냥 사는 겁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돌멩이는 그대로 있고, 풀은 나는 거고, 사람은 그냥 사는 겁니다. 별거 아닌 인생에 의미를 엄청나게 주니까 머리가 아픈 겁니다. 의미를 너무 부여하면 괴롭게 삽니다.”

이런 답변은 모든 고통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려야한다는 불가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인생이 너무 가치가 없어서 자살할 가치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살할 필요도 없으니 그냥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신 고통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하는 삶의 방법왜 존재하느냐?’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원숭이도 원숭이 나름대로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방법을 쓸 것입니다. 늑대에게서 자라난 아이들도 스트레스 받지 않기 위해 늑대로서 행복한 삶의 방법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으로 볼 때 그런 삶은 참으로 고통스럽게 보일 뿐입니다. 입으로 날고기를 먹기보다는 수저로 고기를 익혀먹는 것이 더 행복하고 으르렁대기 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만을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존재하고 어떤 존재이냐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살아야하느냐는 아무리 배워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는 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우선 왜 존재하게 됐는지부터 따져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왜 사느냐?’는 질문의 가장 가까운 대답은 부모님이 낳아주셨으니까입니다. 나를 존재하게 해 준 원인이 내가 살게 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왜 아이를 낳았을까요?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서 낳지 않았을까요? 고생시키기 위해 자녀를 출산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많아지면 그만큼 부모는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랑에는 더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능력에 맞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만큼 출산을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어떤 존재하는 것들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의도는 바로 행복인데, 이를 위해서 태어나게 해 준 부모는 반드시 희생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생겨 난 것이 이유 없이 생겨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의도가 있었고 그것이 그 생겨난 누군가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것은 고통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도 자라날 수도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님의 의도를 깨닫고 그것에 충실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는 아이들의 힘은 바로 부모님이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의 존재 이유가 온전히 부모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게 됩니다. 왠지 부모님만을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모든 이유가 부모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 무게에 비해 부모님이라는 이유는 너무 가볍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기에 부모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반항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낄 때가 사춘기입니다. 차라리 마마보이가 되는 것보다는 부모에게 반항하는 편이 나은데 그래야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때도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참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위기입니다. 아이가 제 삶의 이유인 부모를 찾지 못하면 그 아이의 삶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사춘기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면서 평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이 탈옥하여 도망 다니며 자신이 어렸을 때 너 참 괜찮은 놈이다라는 칭찬 한 마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으로 생명이 태어나기에 생명의 원인인 사랑입니다. 그 존재 이유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하는지 모릅니다.

마를린 먼로는 예쁘고 젊고 돈도 많고 많은 남성들로부터 사랑도 넘치도록 받았지만 그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야 부모의 사랑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지만 왜 살아야 하나?’라고 묻는 영혼의 원천은 다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목마름과 배고픔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마를린 먼로와 같은 사람들은 실상 목이 말랐는데 밥만 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밥을 먹어봐야 목마름은 커질 뿐입니다. ‘왜 존재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란 문제에 보다 깊은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해답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육체는 물론 영혼으로 되어 있고 영혼의 원천이 인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의 이유가 하느님임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행복입니다. 아기가 육체의 부모님을 찾아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합니다. 그러면 영혼도 참 원천을 찾아내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행복한 것처럼,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목이 마른데 밥을 먹으면서 행복하다고 믿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돈을 바라며 그것을 추구하며 부자가 되어가는 데 인생의 행복을 느낀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합니다. 물론 대부분은 돈이 좋고, 권력이 좋고, 쾌락이 좋다고 말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배고픔을 면한 것뿐이고 목마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역할을 했던 사람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없다면 예수님이 오셔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음식만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가져다주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광견병의 개에 물리면 걸리게 되는 공수병이 걸려 아예 물을 두려워하여 마시지 않아 죽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무언가 목마름을 찾고 있었던 사람들은 마치 목이 타다 샘물을 마신 것처럼 기쁨에 찹니다. 잃었던 어머니를 다시 찾은 것과 같습니다. 삶의 이유이고 원천이며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원천을 찾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행복이 그저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이 없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행복은 고통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습니다. 목이 말라야만 물을 마시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의 바다로 우리를 나아오게 하신 이유는 이 고통이 참 행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행복이란 세상에서 닥쳐오는 고통마저 시원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고통이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와 함께 가다가 참 행복에 관해 말합니다.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니냐?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아니다. 참 행복은 내가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했을 때, 그 사람이 욕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것이 참 행복이다. 그리고 다신 문을 두드려 또 청하면 그 사람이 오물을 끼얹을 텐데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다시 문을 두드려 형제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조를 때, 그 집 주인이 몽둥이를 가져 나와 나를 때린다면 이것이 참 행복이다.”

 

행복은 고통이 없는 것으로 알았던 우리에게 이 성인이 정의한 행복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추운 겨울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면서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온천을 겨울에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는 바로 그 뜨거움과 그 차가움이 함께 만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노천탕에 가기 위해 더운 목욕탕 문 밖으로 나가면 칼바람이 불어 매우 춥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칼바람입니다. 이 칼바람이 멈추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을 텐데 왜 이 고통 가운데 살게 하셨을까요? 바로 고통 없이는 참 행복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뛰어보기도 하고 주위에 심겨진 나무나 날아다니는 새들에 정신을 팔아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추위를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결국 생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뜨거운 김이 솟아나는 온천을 찾아야합니다. 그것 없이 노천탕을 만들어 손님을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삶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며 행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너무 깊이 담그면 그 또한 오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손은 쪼글쪼글해지고 열이 너무 높아져 다시 나와야합니다. 다시 나오면 또 춥습니다. 물론 추우면 다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너무 숨는 것 또한 이 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정확히 맞지는 않습니다. 노천탕은 반신욕이 최고입니다. 저도 한 겨울 영하 10도 가까이 내려가는 때에 허리까지만 담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서 얼마 못 견디고 다 들어갔지만 저는 한 시간을 있었는데도 더 있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밑에서 올라오는 그 뜨거움이 몸을 타고 머리 쪽으로 올라가는데 불어오는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니 가슴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노천탕의 맛이구나!’를 느꼈습니다. 칼바람이 있어야 온천의 뜨거움도 기쁨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고통과 멸시를 청했던 것입니다.

 

한 소녀가 열심히 달려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손과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에 쓰인 나 너 좋아해!’란 글을 보았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그 고통 때문에라도 그 사랑이 더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고통과 사랑은 단짝입니다. 희생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소녀는 고통 가운데 자신의 뜨거움을 식힙니다. 사람들이 그 뜨거움을 느끼고 회개합니다. 그래서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엔 그 두 사람이 서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반, 세상의 칼바람 반으로 이 세상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죽지 않고 부활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서 달리게 하신 그분과 다시 만나 완전한 사랑에 다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삶으로 참 행복이 무엇이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이 그런 분입니다. 뜨거운 사랑은 우리 몸의 반을 칼바람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 균형 잡힌 십자가 사랑의 삶이 마치 노천탕과 같이 칼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살게 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이 우리 존재 이유요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 행복한 삶을 배워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지를 배운 이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존재 이유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사는 지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물 위를 걸으신 것처럼 우리도 물 위를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란 바로 이전의 자신입니다. 이전의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던 우리를 없애시고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십자가의 모범으로 우리가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닥쳐올 고통과 멸시가 기대됩니까?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자신으로 만족하기에 멸시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면 세례자 요한이 지목하고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삶의 의미이고 그 변화된 십자가의 삶이 삶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행복이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 행복을 위해 천상 부모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셨고 세상 고통의 바다에서 참으로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진정 삶의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 편안함만을 원합니까? 참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의미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은 편안함만을 찾으며 두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원한 결과가 기다립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왜 세상을 이기게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지목하고 있는지 그 무게감을 신중하게 직시하고 따라가 삶의 이유인 그분을 꼭 만나 뵈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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