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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문이 아닌 절실한 나의 의문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6 조회수967 추천수9 반대(0) 신고


 

소문이 아닌 절실한 나의 의문

 

- 윤경재 요셉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현대·기아차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피터 슈라이어 사장은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입니다. 기아차를 디자인 기아로 바꾼 장본인입니다. 2006년 그를 거액의 연봉을 주고 영입한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액수에 놀랐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었기에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을까하고.

 

기아 자동차 디자인 부서에서 기어 손잡이를 만들었을 때입니다. 담당 직원은 색상과 라인까지 디자인해 시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슈라이어가 와서 그걸 봤습니다. 그에게 기어 손잡이를 잡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잡았더니 직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꽉 눌렀습니다. 아플 정도로 말입니다. 담당 디자이너가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자 슈라이어가 말했습니다. “자동차의 기어 손잡이는 몇 시간씩 손을 올리고 있어도 편해야 g합니다.” 그는 디자인만 보지 않았습니다. 운전하는 사람과 자동차가 한 몸이 되는지를 체크했습니다.

 

그는 취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 기아차는 매우 평범했다. 당신이 도로에서 기아차를 봤을 때, 그 차가 한국 차인지 아니면 일본차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딱 보자마자 단번에 기아차라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위인전에 단골로 등장하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여섯 살이 된 에디슨은 거위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궁금했습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어미 거위가 알을 품어서 부화하는 거라고 무심코 말해주었습니다. 에디슨은 궁금했습니다. 만약 자기가 알을 품어도 부화될지 알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품어야 부화되는 것일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여섯 살배기 에디슨은 헛간에서 거위 알을 품고 오랫동안 엎드려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에디슨의 이런 행동을 천재들의 엉뚱함이라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절실한 의심이었고 물음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소문으로 듣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욥기에서 자신에게 닥친 온갖 불행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드릴 수 없다고 하느님께 항의하던 욥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서 비로소 고백한 구절이 욥기42장에서 나옵니다. 그 내용의 요지는 여태껏 남의 말만 듣고 진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는데 직접 하느님을 뵙고 그 의심을 풀어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42,2~6)

 

불교에서도 깨닫기 위해서는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화두 참구는 밥을 먹거나 걸을 때, 일하거나 쉴 때, 남과 대화할 때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도 화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화두를 깨기는커녕 화두가 잡히지도 않습니다. 간절함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소연합니다. 왜 내게는 간절한 의문이 안 생기나. 답은 간단합니다. 아직 나의 물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에디슨처럼 몸으로 하는 물음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와 운전자가 하나 되는 과정을 건너뛰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남의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와 바리사이의 단식은 사실 구약에서 말한 단식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구약에서 단식은 레위기 16장 속죄일이나 전쟁을 앞두었다던 지,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이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는 등 특별한 날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과 바리사이의 단식은 매주 일정한 날에 바쳤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그냥 단식을 행했습니다. 아니 거행하였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자신들만이 하는 표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목적이 변질되었습니다. 절실함이 퇴색되었습니다. 단식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변질된 단식의 의미를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르 2,19~20)

 

지금은 구원의 시기이며 단식이 필요한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절실한 자신의 물음이 될 때 저절로 단식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보여주셨던 예수를 다시 뵙기를 청하며 단식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마치 욥이 네 친구들의 위로를 거부하고 끝까지 하느님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소문이냐 나의 의문이냐의 차이는 남이 문제를 제기한 것을 푸는 단계에 멈추느냐 아니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단계로 도약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남이 제출한 문제를 푸는 대상에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욥처럼 에디슨도 슈라이어도 자신에게 문제를 던졌습니다.

 

불교에서 화두 풀이도 남이 풀이해 논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답하면 스승은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고 구체적 몸의 언어를 드러내야 겨우 인정해 주십니다. 새로운 화두를 창조하여 스승께 되물을 수 있어야 겨우 승낙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음을 제기하는 두 번째 단계마저도 또 뛰어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예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처럼 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참뜻도 여기에 담겼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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