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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 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강론 [2017년 1월 8일 주일(주님 공현 대축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6 조회수1,414 추천수0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cotidie/201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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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7 18일 주일[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이사야서 60,1-6

화답송 : 시편 72(71),1-2.7-8.10-11.12-13(◎ 11 참조)

2독서 : 에페소서 3,2.3.5-6

복음 : 마태오 복음 2,1-12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7820&gomonth=2017-01-08&missatype=DA

*한국 전례력에 기준하여 강론날짜와 당일 복음 말씀을 명기합니다실제 교황님 강론 날짜는 1 6(로마의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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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강론

http://www.news.va/en/news/the-popes-homily-on-the-feast-of-the-epiphany

 

2017-01-06 바티칸 라디오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금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다음은 교황 강론의 영어 번역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오 복음 2.2).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이 말로 그들이 한 긴 여정의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들은 새로 나신 왕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보고 경배하다. 이 두 가지 행동은 복음 구절에서 두드러져 보입니다. 우리는 별을 보았고 우리는 경배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을 떠나게 만든 별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어떤 것을 발견했던 것이 이 일련의 모든 일들에 불을 붙였습니다. 별은 그 동방박사들만을 위해서 빛나지 않았고 또 그들이 그 별을 볼 수 있는 특별한 DNA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교부가 바르게 설명했던 것처럼 동방 박사들은 그들이 별을 보았기 때문에 길을 떠났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길을 떠났기 때문에 별을 보았습니다(성 요한크리소스토모 참고). 그들의 마음은 지평선에 열려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쉼 없는 내면에 인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에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 박사들은 믿는 이들의 전형이며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들의 전형이며 그들의 집 하늘 나라의 본향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했던 모든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솟아납니다. 그들이 복음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우리의 삶을 작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드는 모든 시도 앞에서 우리가 깨어있도록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어둠의 모든 예언자들 앞에서 저항하는 믿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갈망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희망을 살아 있게 합니다. 매주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이 같은 갈망이 나이든 시메온을 매일 성전에 가도록 이끌고 구원자를 두 팔에 받아 안기 전에는 그의 삶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갈망이 그 자기 파괴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그의 아버지의 품을 찾도록 탕자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아흔 아홉마리를 놓아 둔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가는 목자가 느끼는 갈망입니다. 무덤에 달려 가서 부활하신 스승님을 만났을 때 그 주일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같은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아무것도 별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철갑 같은 고립에서 우리를 꺼내 줍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우리의 따분한 일상을 산산이 부수어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변화를 만들도록 우리를 떠밀어 냅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이 갈망을 느끼는 믿는 이들은, 동방 박사들이 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기 위해 믿음에 인도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변부로 갑니다. 최전방으로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장소들로 그들의 주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우월감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아직 미지의 영역인 사람들의 눈을 못 본척할 수 없는 구걸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합니다.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과 태도가 베들레헴과 가까운 헤로데의 궁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길을 떠나 가는 동안 예루살렘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찾기 보다는 잠자고 있던 헤로데와의 공모하여 예루살렘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잠자고 있었고 마비된 양심으로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혼란스러웠고 두려웠습니다. 역사를 뒤바꿀 새로움에 직면했을 때 혼란스러움은 그 안에 닫혀 버리고 그 성취, 그 지식, 그 성공에 갇혀 버립니다. 자신의 부유함 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자의 혼란은 아직 그 혼란을 넘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 혼란스러움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박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는 문화 안에 빠져 있는 사람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오로지 승자들을 위한 자리만이 존재하는 그 문화 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움. 두려움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 앞에서 느끼는 불길한 예감은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진리와 세상과 이 삶에 집착하는 우리의 방법들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헤로데는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헤로데를 범죄 안에서 안정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너는 그들의 몸이 작은 이들을 죽인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네 마음 안에서 너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성 구옷불트데우스 (SAINT QUODVULTDEUS), Sermon 2 on the Creed: PL 40, 655).

 

우리는 경배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경배하러 동방에서 왔고 그들은 왕에게 어울리는 곳, 왕궁에서 그렇게 하려고 왔습니다. 그들의 탐구는 그들을 궁전으로 이끌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궁전 안에서 모든 그의 신하들에 둘러싸여 왕궁에서 태어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권력과 성공, 성취의 삶에 대한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공경을 받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아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이죠, 그러나 반드시 사랑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세속적인 카테고리들, 우리가 존경하는 볼품없는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대한 숭배, 외모와 우월함에 대한 숭배. 슬픔만을 약속하고 오로지 노예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우상들.

 

멀리서 온 그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긴 여정에 나설 곳은 그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대범하게 더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나섭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것이 궁전에 없으며 실존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궁전에서 그들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왕을 찾도록 그들을 이끌었던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압제가 아닌 자유의 기치 아래에서만 이 알려지지 않은 그들이 열망하는 왕이 우리를 깔보지 않고 노예로 만들지 않고 우리를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들어 올리시고 용서하시고 치유하심을 깨닫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 또는 우리가 그토록 자주 그분을 거부했던 장소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음을 깨닫는 것. 하느님의 눈 안에는 상처 받고 지치고 홀대 받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언제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러한 그분의 힘과 그분의 권능은 자비라고 불립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예루살렘이 베들레헴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요!

 

헤로데는 사물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방법을 바꿀 수도 없었고 바꾸지도 않을 것이기에 경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경배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도 경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훌륭한 지식을 갖고 예언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을 바꾸거나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틀에 박힌 상황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시대의 헤로데에게 익숙했고 질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베들레헴에는 새로움의 약속, 거저 주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정을 떠날 용기가 있었기에 동방 박사들은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고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 베들레헴의 예상치 못한 알려지지 않은 아기 예수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했습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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