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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대로 된 쉼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18 조회수1,131 추천수8 반대(0) 신고

 

 

 

 

제대로 된 쉼 

 

- 윤경재 요셉

 

 


 

항간에는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하는 새로운 용어가 계속 탄생하고 유행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에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갖고 사귀는 것을 옛날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60년대에 와서는 연애가 되었고, 최근에는 출처도 아리송한 썸 탄다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썸 탄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쓸 줄 안다면 아마 신세대이거나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태가 바뀌고 용어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남녀 간에 사귀는 말에 더 심한 용어로는 작업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작업에 따라 다니는 말이 선수입니다. 작업을 거는 선수들은 남녀 간의 사귐을 하나의 게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이해하고 아낀다는 만남과 사귐의 본질을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상대방이 인격을 지닌 주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쾌락이라는 메달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도구라고 여깁니다. 이들은 인생 자체를 게임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소위 율법에 선수들인 자들이 예수를 걸고넘어질 모종의 작업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같은 율법학자들이라도 이성적이고 창피를 아는 니코데모 같은 바리사이들이 처음에는 호기심과 호의를 갖고 예수의 언행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쉽고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자신들에게도 어떤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예수와 그 일행이 벌이는 행동이 거슬렸습니다. 예수는 민족의 배신자요 지탄의 대상인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 거침없이 들어가 식사도 하고 잔치를 베풀며 사귀었습니다. 그나마 회당 밖에서 병자를 치료해 줄 때는 참아줄만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회당에 많이 모일 때 병자를 치료하여 예배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회당에 모이는 숫자가 느는 것은 예수에게 치료를 받고자 병자와 가족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회당에 모이는 목적이 변질된 것 아닌가 하는 불평불만이 바리사이파 사이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자신들이 원치 않았던 피해가 직접 다가오니 이젠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참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하고 성을 잘 내는 바리사이들이 모여 대책을 의논하였습니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선수인 율법학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상대방의 주체성을 인정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독사의 눈을 지닌 선수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해치울 수 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예수께서는 독사들의 구덩이에 들어오셨습니다. 역시 선수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그건 ‘덫’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예수는 그 덫을 밟았습니다. 온 세상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곳인데 어디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걸 아셨기에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법이 미치지 않는 곳은 우주 전체 아무 곳도 없습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힘으로 살면 아버지의 뜻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거창한 철학이나 사상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예수의 안식일은 달랐습니다. 예수에게 안식일은 자신이 쉬고, 이웃이 쉬고, 세상이 쉬고, 아버지가 쉬는 날이었습니다.


예수 앞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양이 구덩이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안식일이지만 그 양은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보시는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양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세상 역시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모두를 품으신 아버지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쉬지 못할 때는 아버지도 쉬지 못합니다. 내가 쉴 때라야 비로소 아버지도 쉬십니다.


쉰다는 게 무엇일까요?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일류 호텔에 머물며 바닷가를 걸어야 쉬는 건가요? 눈 덮인 설악산 콘도에 가서 따듯한 방에 앉아 멋진 설경을 바라보는 게 쉬는 건가요? 아마 한두 시간쯤 지나면 모두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 검색을 하던가, 카톡에서 친구들이 올리는 시덥지 않은 글에 대꾸하느냐 온 정신을 놓을 것입니다. 아니면 SNS에 오늘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그럴듯한 놈을 골라 올리기 바쁠 것입니다. 그러다 싫증나면 쇼파에 팔베게 하고 가로 누워서 TV드라마를 보겠죠. 그래도 이 정도면 좀 쉬는 축에 속합니다. 아예 회사 공동 카톡방이나 밴드에서 올라오는 업무나 확인하고, 이메일을 열며 밀린 사무를 본다면 쉬지도 못합니다.


시간과 장소만 옮겼을 뿐, 에고의 욕망을 놓지 못하고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욕심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쉰다는 건 에고의 욕망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하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회당 안은 아버지를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안에서 쉼을 맛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도저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그는 몸과 마음이 다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 장애인을 두고 팽팽한 두 시선이 교차합니다. 번뜩이는 선수의 눈과 쉼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 안에 모인 모두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는 말씀을 실행하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습니다.

 

그의 오그라든 손과 마음이 한꺼번에 모두 다림질을 받아 펴졌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제대로 된 쉼을 영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 선수들의 마음은 오히려 심하게 구겨져 버렸습니다. 제대로 쉬는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또 편안히 쉬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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